페인트공/ 손순미/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페인트공
그의 거주지는 늘 허공이었다 그는 종일 허공의 벽을 타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허공에서만 전시되었다 지상의 사람들은 그 허공을 정원이라 여기며 그
에게 팽팽한 밧줄을 던졌다 그의 정원은 위작이거나 모작이었다 그의 부리가 닿
을 때마다 꽃들은 있는 힘을 다해 붉어졌다 정원은 완전한 봄이 되었다 지상의
사람들이 완성된 정원을 보고 박수를 쳤다 허공에 태어난 정원은 잎이 지지 않
고 꽃이 시들지 않는 지루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무거운 날개를 열고 그가 잠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감상]
페인트공을 바라보는 시각이 독특하여 신화적입니다. 페인트칠 하는 곳곳이 정원이 되는 의미는, 그 행위 자체가 새로움을 명명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창조에 관한 모티브를 은유적으로 비껴가면서 시적 성취를 보인 점이 돋보입니다. 또한 ‘지루한 기쁨’처럼 인공미에 대한 시적 사유도 상당한 내공입니다. ‘무거운 날개를 열고 그가 잠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지막이 내내 뇌리에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