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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 허연

2002.05.22 09:55

윤성택 조회 수:1351 추천:199

『불온한 검은 피』 / 허연/ 세계사



        필름


             1
        까까머리 중학생 하나가 소주에 취해 교실에
        들어오다 여선생에게 뺨을 맞고 있었다
        봄볕은 뜨거웠다

        그날 밤 녀석은
        미군부대 담벼락에 유화를 그리고 있었다
        밤새 막걸리에 취한 과부엄마를 그리고 있었다

        
          2
        아교질의 비가 내리던 날
        상식을 무시한 청년들이
        권총을 들고 굴다리 여인숙에서 쏟아져나왔다

        그들에겐 여자가 있었고, 아이들이 있었고
        돈이 없었다

        불꽃 같았지만 너무 잠깐이었다
        세월은 계급이었고, 독약이었고
        겁에 질린 어머니였다


          3
        가슴에 묻을 게 많았다 너는
        철로변에 살았었고, 조막손이었고
        빵을 훔치던 계집애를 사랑했고
        
        너는 진흙탕 위에 발자국을 찍었던가
        예수를 그렸던가
        장미꽃 한 다발 바닥에 버려지고
        그게 전부였던가



[감상]
누구에게나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 기억은 여러 가지 유기적 감각과 맞물려 마음 속에 하나의 필름으로 자리하고 있을 테지요. 이 시는 그런 인상들을 마치 영화 속 한 장면들처럼 간결하게 소묘해 놓고 있습니다. 장난감 로봇을 따라 슈웅 날아갔던 시절 도란도란 요정집 뒷문 열쇠구멍으로 훔쳐본 목욕물 소리, 불장난 하다 외할머니집 헛간을 타 태워 산으로 줄행랑쳤던 쓸쓸한 저녁. 예뻐서 샀는 걸? 그래도 왜 생일 날 흰 국화야! 오도가도 못하고 나를 붙잡았던 기억들. 오늘 봄볕에 꺼내 말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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