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 심재휘 / 『현대시학』 2002년 6월호. '현대시 동인상' 수상작 中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후회는 한 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내가 건너온 시장의 저녁이나
편지들의 재가 뒹구는 여관의 뒷마당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해 있는 것들 중에 만질 수 있는 것은 불꽃밖에 없다
는 것을 안다 한 평생은 그런 것이다
[감상]
여관과 편지가 서로 연관성이 없을 듯 싶으면서도, 아련한 감성으로 안내합니다. 사랑의 감정도 어쩌면 한 평생을 만드는 제재일 것이고 일생을 완성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어떠한 사연도 기억 저편으로 배달되기까지 우리는 우체통처럼 안으로 품고 늙어가야 하고요. 가끔씩 편지를 씁니다. 지금의 감정을 또박또박 적으면서 오래도록 기억해야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