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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 윤이나

2002.06.04 16:12

윤성택 조회 수:1198 추천:213

해마다/ 윤이나/ 『시와사상』여름호 (2002)



  해마다

  아침 댓바람부터 김씨는 난리법석이다  평상 옆에 묶어놓은 누렁이 순둥이가  없어
진 것이다 복날이 낼모레라 누가 끌고 간 것일텐데 찾기는 어디 가서 찾을 거냐고 타
박하는  마누라의 무정함에 눈을 흘기며 이름을 잘못 지었어  팔자도 이름 따라 간다
는데 좀 독하게 지을 걸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순둥이 라고 지어 가고  김
씨는 괜히 이름  탓을 해 본다 덩그런 나무집 안에 깔린  라면 박스 틈으로  순둥이가
물어다 놓은 봉숭아 꽃 대,  아이고 이놈의 개새끼  또 내 봉숭아 다 뜯어먹었어 아이
고 내가 못살아  개새낀지 염소 새낀지도 모르는 놈의 종족 어디 가서 확 뒈져버려라
마누라의 악담에 김씨는 봉숭아를 심어놓은 밭으로 쑥 들어가 지근지근 밟아버린다
아니 저 영감이  아침부터 미쳤나  억센 마누라는 물 한바가지를 김씨에게로 던진다


        물이 던져졌다
        한여름 햇살을 쪼개고
        영감 할멈 오십 년 부부사이도 쪼개고
        뜯어진 봉숭아 잎 몇 개처럼
        누렁이 순둥이로 살아 온 몇 날처럼
        세상에 던져졌다

        공중에 멈춰진 물방울들
        투명하게 날을 세워 여름의 앳된 얼굴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김씨의 귓불에 컹컹 짖으며 이빨자국을 돋게도 하고
        할멈의 검버섯 위에서 군데군데 피고 지는 봉숭아 이파리가 되기도 하고

        해마다 찾아오는 여름은 덥기도 하고



[감상]
잘 그린 삽화처럼 풍경이 선한 시입니다. 복날이 가까워질 무렵, 시골 어느 풍경에 가만히 귀를 대어보게 하는 시입니다. 김씨는 사라진 순둥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봉숭아를 심어놓은 밭으로 쑥 들어가 지근지근 밟아버"리는 행위. 김씨의 속내를 슬쩍 비껴가며 감정이입을 주는 것이 참 인상적입니다. 또 "공중에 멈춰진 물방울들" 부분에서 잠시 멈춰 서게 됩니다. 우리는 무한한 시간에 내던져진 존재이고, 삶이란 그 시간의 갈피마다 끼워진 찌라시 같은 것이기에 '시간의 멈춤'이란 모든 것이 객관화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한참 혼자 비디오를 보다가 '멈춤'해 놓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게 하는 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결국 아웅다웅 살아가는 늙은 농촌부부의 정지된 삽화를 통해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발견하게끔 합니다. 사진 한 장, 여기 해마다 더운 여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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