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여행/ 손현숙/ 『문학사상』6월호 (2002)
이별여행
완성되지 못한 피아노의 화음들이
안간힘으로 시간을 넘는다.
저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 혹은 눈동자는
망설이며 애매함을 더듬는 거다.
손가락이 추억하는 기억의 현들은
스스로를 늘였다 줄였다
공기의 순간들을 건드린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욕망과 결심
두 개의 살아 있는 세상을 지나
포기하지 못하는 생의 한 음보가
느리게 건반 위에서 춤을 춘다.
약속했던 모든 것들은 지켜지지 않았다.
음지에서 키워졌던 높은음자리
누구의 가슴속에도 자리 잡지 못했다.
이미 지난 날들과 아직 오지 않는 밤
비틀리는 단조와 장조의 소리들은
훔친 비밀만큼이나 멀고도 위태롭다.
한순간 합하고 무너뜨리는 현들의 울림
저 소리들이 끝나는 곳에서
현란했던 기억들도 곧 끝을 맺으리라.
생각은 생각 위에 생각을 쌓고
영원한 페르마타*, 그 이상한 날들을 끌고
오늘도 너를 기억하는 손이 뜨겁다.
* 지휘자나 연주자의 임의대로 쉬어 감.
[감상]
이별을 직감한 그가 피아노를 칩니다. 피아노의 선율은 그를 기억에서 불러내고, 어떨 때는 격정적으로 또 어떨 때는 가녀림으로 추억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피아노를 치는 순간을 이렇게 언어들로 가지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별'이 아닌 것들은 약속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서로의 약속이 깨지고 화음에서 벗어난 음표 하나가 또 다시 다른 악장에 내려와 앉습니다. 그래서 여행은 이별이라는 환승역에서부터 시작인 것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