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 이영식/ 2002 『문학사상』 4월호
낮달
거울 속보다 고요한 날
양지바른 블록 담 아래
노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빈 부대자루처럼 접힌 몸
번갈아 의자에 부렸다 세우며
명함판 사진을 찍습니다
햇발도 참말 좋아
잎새들 초록초록 혀를 내미는데
이승의 끝자락, 마지막
그 밤을 지킬 모습이라니!
얼굴은 오래된 놋쇠빛이 되고
끊었던 담배에 손이 자꾸 가는데
주름 활짝 펴 웃으라는
빵모자 사진사의 주문에
덩굴장미만 벙글벙글 피어나는
날도 억수 좋은 날
영정(影幀)처럼 떠 있는 돛배 하나
늙은 복사나무 가지에 걸립니다
[감상]
봄은 태어남의 계절이지만 여기 노인들이 맞는 봄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영혼을 담는 자루라는 시선과 "초록초록 혀를 내미는" 잎새의 표현이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봄날의 싱그러움을 노인들의 사진 찍는 모습에서 찾아낸 점이 인상적이네요. 봄은 아이들이나 청춘들에게로 오는 아니라, 이렇듯 노인들의 활짝 웃는 모습에도 온다는 사실. 새삼 세상이 따뜻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