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이혜진/ 2002 『시와사상』 봄호 신인당선작 中
뱀
집안 곳곳에, 적들, 굼벵이는 살이 토실하게 올라 있었다 그 날 밤에도 나는
냄비 속에 들어가 있는 한 떼의 굼벵이를 뒤적거리며 난쟁이 반장 민석이의
구두굽처럼 높은 아파트와, 가난한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마녀의 길다란 머
리털을 토로(吐露)하고 있었다 뱀 같은 자식,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자기보다 커다란 코끼리를 삼킨 뱀처럼, 홀쭉한 뱃가죽에 커다란 욕심을
삼켰다며 내 몸뚱이를 녹슨 뒤집개로 뒤집곤 했다 반지하 단칸방은 허술했
다 혹은 진실했다 장마철이 되면 물, 방 안 곰팡이처럼 눅눅해진 내게 물을
끼얹기도 하고 겨울철이 되면 추위, 동사(凍死)하는 사내들의 살갗을 내게
이식시켰다 불행히도 내 혈관 마디, 마디에는 차가운 피 대신 뜨거운 피가
흐느끼고 있었다 완전히 뱀으로 변태(變態)해 동면(冬眠)하고만 싶은 추위
였다 겁에 질린 코끼리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던 새벽, 나를 안고 주무시던
어머니는 발끝까지 돋은 비늘을 잡아떼며 밖으로 나가셨다 한참 후 어머니
는 온돌 하나를 들고 오셨다 수십 년을 묵은 땅, 땅에, 뜨거운 온돌을 감은
또아리가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감상]
육화肉化라는 단어가 떠오르는군요. 반지하의 풍경이 이 시를 지탱합니다. 빼빼 마르고 배만 불룩한 난민촌 아이 같았던 그 시절, 이 시는 그 배를 "뱀"과 "뱃가죽"을 은유시키며 상처의 것들을 각인시켜놓습니다. 아울러 겨울잠을 자는 "뱀"의 생태가 화자의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오히려 "뱀으로 변태해 동면하고만 싶"다고 진언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가 좋은 이유는 희망을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점이겠지요. 그것은 "온돌"의 상징으로 다가오는데, 그 온돌을 가져온 주체가 "나를 안고 주무시던 어머니"라는 것이 울림으로 전해져 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