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사람과의 약속』/ 정한용/ 민음사
바다에 누워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바다에 던져지겠다
무수한 물고기떼가 몰려와 내 살점을
뚝뚝 물어뜯고 배부른 기쁨으로 돌아갈 때
바다 가장 깊은 곳에 앙상한
뼈 뿐인 뼈로 누워
고요히 수억년 잠들겠다 기꺼이
한 개 화석으로 굳어지겠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어느 봄날 인간은
사라지고 그 신선한 대지 위에
햇살만이 남아 있을 때
민들레 씨앗만이 혼자 놀고 있을 때
우주 저편에서 불현듯 내려앉은 지구의
새 주인들에게
나는 내 모습을 보여주겠다
과거 어느 때 인간은 이런 모양새로
앙상한 갈비뼈와 몇 줌의 살과 슬픔덩이
외로운 육신을 거느리고 살았다고
남겨놓을 것 하나 없는 이 허무와 부재 속에
자유와 평등 따위도 다 묻어두고
썩어 석유 몇 방울로 보시하기 위해
이 땅에 입다물고 묻혔다고
그렇게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나는 바다에 던져지겠다
[감상]
가끔씩 죽음에 대해, 나를 완성하기 위해 수없이 나를 거쳐간 죽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끊임없이 나를 나이게 하는 집착. 삶은 어쩌면 우주의 어떤 질서에 끝없이 수신하면서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나를 육체에 담아내는 일. 이 시가 좋은 이유는 그러한 "죽음"에 관해 되돌아보게 합니다. 강장류에서 거슬러 포유류가 되기까지의 어머니 뱃속에서의 세월을, 구름 낀 바다에서 번개가 치울릴 순간이 내 인생 전부의 시간임을, 집착의 나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서게 하는 느낌이 전해져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