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한혜영/ 시작 시인선
밤하늘
저 검은 서류는 아무도 위조하지 못한다
매일 바꾸는 인감도장 오늘밤은
수만 개 발을 거느린 돈벌레 같다
어둠 걸쭉해지자마자 성냥불 탁탁!
튀는 걸로 봐서 미련한 도적놈
몇이나 벌써 붙은 모양이다마는
나는 굳이 애쓰지 않으련다
수많은 위조꾼들의 최후가 어떤 건지
맨발로 끌려가던 아버지가
다급하게 주신 말씀 아니더라도
지독하게 난해한 저 문서를
해독할 능력이란 도무지 없는 것이다
백지 위에 인생들은 그렇듯이
쉽게 읽히는가? 카피에 표절
시비가 끊이지 않는 생들
고백하건대 나 역시 도적이었다
어머니의 인생을 카피한 딸년
그 형편없는 이력을 모르는 채
기웃거리는 눈들 있다면 은근하게
귀뜸이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다
절대로 위조하지 마라
내 영혼은 해독불가능의 그믐밤
미궁(迷宮)으로 가는 버전에 든 지
이미 오래였다고
[감상]
"서류", "위조" 첫 행부터 호기심이 듭니다. 사람은 죽어서 별이 된다면, 밤하늘이야말로 죽은 사람의 원판으로 빛나는 별이 가득한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한 生을 살다가는 우리는 어쩌면 수많은 시행착오의 깨달음을 각인시키며 죽음으로 진화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요. "고백하건대 나 역시 도적이었다"에 이르러 잠시 멈추게 됩니다. 눈물은 남의 인생을 카피하거나 해독할 때 분비되는 다른 하나의 성분이지 않을까. 기억하는 것만 내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라면, 무의식에 버려졌던 기억은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 그런 미궁이 이 시에서 읽혀집니다. 업그레이드할 때가 되었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