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을 지우며/ 박남희/ 교육마당 2002년 5월호
칠판을 지우며
칠판 위에 깨알같이 박혀있던 글씨들을
힘껏 지우개로 지운다
열심히 글씨를 지웠는데도
글씨들은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있다
내가 한동안 정겹게 바라보던 칠판의
내 어린 시절 그 눈빛도
아주 지워졌을까?
햇빛은 어느새 교실 깊숙이 들어와
창 밖의 오래된 나무 그림자를
아이들의 공책 위에 눕힌다
커다란 나무 그림자 사이로
어린 시절
한자씩 채워지던 공책의 빈칸들이 일어선다
그 빈칸에
아주 지워지고 없어진 것 같던
선생님의 말씀이 또렷이 채워진다
세상은 어느덧
저마다의 글씨로 채워졌다 지워지고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이야기를 담은 교실은
정오를 지나
어느덧 추억 쪽으로 건너가 있지만,
나는 아이들이 다 떠난 교실에서 칠판을 지우며
지워도 지워도 아주 지워지지 않는
하얀 백묵 하나의 아름다운 궤적을 생각한다
[감상]
추억이 칠판에 덧칠되어 적혀 있습니다. 쓰고 지우고 했던 그 교실의 유년을 떠올려보면 "저마다의 글씨로 채워졌다 지워지"는 세상이 어떤 것을 가르쳤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칠판 지우개 속으로 사라진 언어들이 점심시간 창가에서 퍽퍽 흰 분필가루로 털려질 때, 그때쯤 나는 철봉에서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삶은 매달리기인가 아닌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궤적을 그리며 철봉에 다리를 걸어보고 싶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