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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식탁 - 이윤학

2001.05.11 10:42

윤성택 조회 수:1369 추천:261

붉은 열매를 가진적이 있었다/ 이윤학/ 문학과지성사


        버려진 식탁
                        

        언젠가 식탁을 하나 샀다. 꽃병
        속에 꽂혀 있던 꽃들이 시들어
        몇 차례 버려졌다. 그리고
        꽃병 속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 의해 꽃병은 엎질러지기 시작했다.

        처음, 의자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가.
        식탁은 저녁을 위해 차려진 적이
        있었다. 의자들은 이 방
        저 방으로 흩어졌다. 벗어놓은 옷이
        뒤집혀, 의자 위에 쌓였다.

        한 방에서 일일 연속극이 시작되고
        한 방에서 흘러간 노래가 흘러나왔다.

        식탁 위엔 신문지와 영수증,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 봉지가
        올려졌다. 한때는, 그곳에서 양파를 기른 적도 있었다.
        양파 줄기는, 잘라내자마자 다시 자라났다. 점점 가늘어져
        창문에 가 닿을 듯했다.

        말라비틀어진 양파 줄기 위에
        더 많은 신문이 던져졌고,
        영수증과 프라스틱 용기와 비닐 봉지가 쌓여갔다.
        
        검은 비닐 봉지 속에서,
        많은 과일들이 썩어나갔다.

        어느 날 저녁, 그것들을 들어냈다.
        몇 해 전에, 야유회에 가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오랫동안 유리 밑에 깔려 있었으나, 놀랍게도
        사진 속의 얼굴들은 잔디밭에 앉아 웃고 있었다.





[감상]
버려진 것에 대한 시각이 새롭습니다. 식탁의 일생을 보는 것이랄까요. 그러한 모습에서 마지막 사진 한 장의 처리는 무언가 읽는이로 하여금 깨달음을 줍니다. "놀랍게도/ 사진 속의 얼굴들은 잔디밭에 앉아 웃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사멸되는 것들에서 피어나는 황홀한 생명의 흔적. 잔잔한 흐름 속에서 내가 버렸던 것들이 생각나는, 아님 내가 버려지면서 떠올려지는 바람 부는 화창한 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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