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적(跡) - 김신용

2002.09.06 17:19

윤성택 조회 수:1013 추천:172

적(跡) / 김신용/  『문학사상』9월호(2002)


        적(跡)


        벽에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피었다
        음습하고 그늘진 공간의 <모피외투> 같다
        일생을 위해 내가 입었던 허식의 장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밀었던 내 결핍
        오늘도 숲 속의 푸른 지의류처럼 돋아나, 나를 덥고 있다
        생을 썩이지 않으면 삶이 돋아나지 않았던
        그 습기 차고 축축하던 나날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갈증의 미세한 포자를 퍼트려, 먼지처럼, 공기에 섞여
        공기처럼 흘러다니다가, 방부제인 햇살 한 올
        스며들지 않는 공간을 만나면, 왕성하게 집을 짓는―
        숙주를 부패시킴으로써 번식하는, 그 부패가 뿌리이며 꽃인
        내 기생(寄生)―, 제 시체 속에 제 자신의 뿌리를 묻는
        그 부패의 궤적으로 살아 있다
        의식의 벽지, 내장재(內臟材)인 침묵까지도 파먹고 있는
        밀렵의 올무 같은,
        시간의 마멸성을 닮은―.


[감상]
치열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군요. 곰팡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곰팡이가 피는 과정을 우리의 삶의 과정으로 비유하는 솜씨도 좋고요. 하여 저 또한 세월스럽게 부패중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11 접열 - 권영준 2003.11.04 1008 186
1110 내가 읽기 전엔 하나의 기호였다 - 고현정 2002.12.30 1009 180
1109 나무의 손끝 - 신원철 2003.05.23 1010 167
1108 사라진 도서관 - 강기원 2010.01.21 1011 106
» 적(跡) - 김신용 2002.09.06 1013 172
1106 자전거포 노인 - 최을원 2003.09.03 1013 166
1105 내 그림자 - 김형미 2011.01.14 1014 84
1104 구름, 한 자리에 있지 못하는 - 이명덕 2003.03.17 1016 179
1103 지하도에서 푸른 은행나무를 보다 - 서안나 2003.06.16 1016 164
1102 음풍 - 박이화 2003.12.12 1016 201
1101 누가 내건 것일까 - 장목단 2003.04.22 1018 152
1100 꿈속에서 아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 - 이진명 2003.05.27 1018 149
1099 광릉 뻐꾸기 - 배홍배 2003.07.15 1019 198
1098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2002.06.24 1020 162
1097 산 하나를 방석 삼아 - 이정록 2002.10.31 1020 173
1096 물고기에게 배우다 - 맹문재 2002.11.16 1020 168
1095 사슴농장에 대한 추억 - 윤의섭 2002.07.05 1021 187
1094 석모도 민박집 - 안시아 2003.05.21 1021 155
1093 편집증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 이장욱 2003.01.21 1022 188
1092 하수구의 전화기 - 김형술 2002.10.04 1025 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