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후문 - 김병호

2006.06.01 17:44

윤성택 조회 수:1558 추천:259

《달안을 걷다》 / 김병호/ 《시작》시인선  


        후문(後文)

        마른 가지에 줄긋고
        순한 죽음 기다리는 늙은 거미와
        낮달 자국을 따라
        푸르게 돋는 저녁별이
        서로 스미지도 못하고
        뭉개지도 못하고
        한참 전생을 서성이듯이

        들창 너머의 노을은
        해안선을 밀어 폐선에게 건네주고
        폐선은 다시 늙은 거미에게 곁을 내어주는데
        미처 서녘에 오르지 못한 것들이
        어제보다 시무룩하게 핀 해당화 그늘을 헤쳐
        제 몸을 묻을 때
        거미는 제 걸음으로 별자리를 놓는다

        그새,
        삼베 고의적삼 같은 어둠 한 질이
        모래톱에 지어진다


[감상]
거미와 저녁별, 노을과 폐선이 어우러져 한 폭의 시가 되었습니다. 하루의 후문은 해질 무렵이 아닐까 싶은데, 그 문을 열고 나가면 풍경들이 서로에게 의지하거나 반응하며 밤을 맞이하는군요. <푸르게 돋는>, <어둠 한 질> 등의 행간에서 더욱 서정이 깊어집니다. 오후부터 저녁까지 바닷가 어느 처마를 들여다보는 순하고 착한 눈빛이 떠올려지는 것이어서, 나도 <그늘을 헤쳐/ 제 몸을 묻을>줄 아는 저녁에 가보고 싶어집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11 접열 - 권영준 2003.11.04 1008 186
1110 내가 읽기 전엔 하나의 기호였다 - 고현정 2002.12.30 1009 180
1109 나무의 손끝 - 신원철 2003.05.23 1010 167
1108 사라진 도서관 - 강기원 2010.01.21 1011 106
1107 적(跡) - 김신용 2002.09.06 1013 172
1106 자전거포 노인 - 최을원 2003.09.03 1013 166
1105 내 그림자 - 김형미 2011.01.14 1014 84
1104 구름, 한 자리에 있지 못하는 - 이명덕 2003.03.17 1016 179
1103 지하도에서 푸른 은행나무를 보다 - 서안나 2003.06.16 1016 164
1102 음풍 - 박이화 2003.12.12 1016 201
1101 누가 내건 것일까 - 장목단 2003.04.22 1018 152
1100 꿈속에서 아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 - 이진명 2003.05.27 1018 149
1099 광릉 뻐꾸기 - 배홍배 2003.07.15 1019 198
1098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2002.06.24 1020 162
1097 산 하나를 방석 삼아 - 이정록 2002.10.31 1020 173
1096 물고기에게 배우다 - 맹문재 2002.11.16 1020 168
1095 사슴농장에 대한 추억 - 윤의섭 2002.07.05 1021 187
1094 석모도 민박집 - 안시아 2003.05.21 1021 155
1093 편집증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 이장욱 2003.01.21 1022 188
1092 하수구의 전화기 - 김형술 2002.10.04 1025 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