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그 날 - 이성복

2001.05.30 11:30

윤성택 조회 수:1622 추천:257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 이성복 / 문학과지성사



          그 날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감상]
참 오래된 시집(1980)임에도 불구하고 이성복의 시편들은 낡아 보이지가 않습니다. 현실과 맞닿은 가족과 일상의 불행을 직조해내어, 현란한 이미지로 수놓습니다. 곤고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는 시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11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694 322
1110 카페 리치에서 - 곽윤석 [3] 2001.07.18 1570 304
1109 길에 관한 독서 - 이문재 2001.07.19 1574 291
1108 온라인 - 이복희 2001.07.20 1361 306
1107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2001.07.23 1323 302
1106 푸른 밤 - 나희덕 [1] 2001.07.27 1900 268
1105 낡은 의자 - 김기택 [1] 2001.07.30 1574 248
1104 나는 시간을 만든다 - 박상순 2001.07.31 1437 255
1103 기차는 간다 - 허수경 [2] 2001.08.01 1568 236
1102 나무는 뿌리로 다시 산다 - 이솔 2001.08.02 1359 242
1101 울고 있는 아이 - 배용제 2001.08.03 1494 254
1100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2001.08.04 1241 245
1099 소주 - 최영철 2001.08.06 1556 240
1098 섬 - 조영민 [6] 2001.08.07 2047 256
1097 무인 통신 - 김행숙 2001.08.08 1425 262
1096 편지 - 이성복 2001.08.09 2481 271
1095 Y를 위하여 - 최승자 2001.08.10 1701 265
1094 빗소리 듣는 동안 - 안도현 2001.08.13 1762 235
1093 어느 날 문득 - 김규린 2001.08.14 1779 232
1092 내 마음의 풍차 - 진수미 2001.08.16 1717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