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풀잎 다방 미스 조 - 정일근

2001.06.27 12:51

윤성택 조회 수:1416 추천:265

정일근/ 경주남산(1998, 문학동네), 처용의 도시(1994, 고려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1991, 빛남), 바다가 보이는 교실(1987, 창작과 비평사)



    풀잎 다방 미스 조
        -두려운 미움


        풀잎다방 미스 조는 커피 자동판매기가 밉다
        마담 민언니는 하루하루 배달 주문이 줄어든다고 걱정인데
        종종걸음으로 업무용 가방을 들고 커피배달에 나서다보면
        여기저기 늘어나는 예쁜 커피 자동판매기가
        미스 조의 발길을 자주 멈추게 한다
        교보빌딩 최건축사 사무실 코아빌딩
        10년 단골이라 자랑하던 현대세차장 입구에도
        어느새 커피 자동 판매기가 서 있다
        풀잎다방 미스 조는 저 커피 자동판매기가 밉다
        자신이 열심히 일하는 시간에도
        자신이 퇴근한 후에도 한 달에 두 번 쉬는 일요일에도
        지치지 않는 튼튼한 몸매로 자신의 단골손님을 유혹하는
        커피 자동판매기가 미스 조는 밉다
        풀잎 같은 풀잎다방 미스 조는 사남매의 맏이
        고향 서산바다 섬마을엔 병든 어머니와
        처마 낮은 남루한 도단집 한 채
        막내가 올해 전문대학에 들어갔는데
        한 2년 밤이면 통통 붓는 아픈 다리 참고 걸어가면
        고단한 이 길도 끝이 날 텐데
        그때 전생의 인연이 닿는 그 사람 만날 수 있다면
        작은 방 한 칸에도 만족스러운 착한 아내가 되고 싶은데
        자신의 작은 소망에 발을 거는 저 커피 자동판매기가
        풀잎다방 미스 조는 밉기만 하다
        시든 풀잎처럼 힘겹기만 한 늦은 퇴근길
        잠들지 않고 홀로 서 있는 커피 자동판매기가
        어두운 골목 뒤따라와 자신을 덮칠 것 같아
        2년 만기 평화은행 적금통장을 그냥 빼앗아가버릴 것 같아

        이제는 두렵기만 하다
        커피 자동판매기 동전 투입구 속으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빨려 들어가 끝없이 주르르 쏟아질 것만 같아
        풀잎다방 미스 조는 무섭기만 하다.


[감상]
그랬지요. 다방레지로서 살아가는 일, 어금니를 앙다물고 사는 것이라고. 이 시는 그런 잔잔한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전생의 인연이 닿는 그 사람 만날 수 있다면/ 작은 방 한 칸에도 만족스러운 착한 아내가 되고 싶은데"에 이르러서는 찡하군요. 이 시가 무엇보다도 詩로서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은 2연 부분입니다. 그녀의 두려움이 자판기를 통해 재해석되는 접점, 詩로서 가능한 부분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11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694 322
1110 카페 리치에서 - 곽윤석 [3] 2001.07.18 1570 304
1109 길에 관한 독서 - 이문재 2001.07.19 1574 291
1108 온라인 - 이복희 2001.07.20 1361 306
1107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2001.07.23 1323 302
1106 푸른 밤 - 나희덕 [1] 2001.07.27 1900 268
1105 낡은 의자 - 김기택 [1] 2001.07.30 1574 248
1104 나는 시간을 만든다 - 박상순 2001.07.31 1437 255
1103 기차는 간다 - 허수경 [2] 2001.08.01 1568 236
1102 나무는 뿌리로 다시 산다 - 이솔 2001.08.02 1359 242
1101 울고 있는 아이 - 배용제 2001.08.03 1494 254
1100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2001.08.04 1241 245
1099 소주 - 최영철 2001.08.06 1556 240
1098 섬 - 조영민 [6] 2001.08.07 2047 256
1097 무인 통신 - 김행숙 2001.08.08 1425 262
1096 편지 - 이성복 2001.08.09 2481 271
1095 Y를 위하여 - 최승자 2001.08.10 1701 265
1094 빗소리 듣는 동안 - 안도현 2001.08.13 1762 235
1093 어느 날 문득 - 김규린 2001.08.14 1779 232
1092 내 마음의 풍차 - 진수미 2001.08.16 1717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