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버려진 식탁 - 이윤학

2001.05.11 10:42

윤성택 조회 수:1355 추천:261

붉은 열매를 가진적이 있었다/ 이윤학/ 문학과지성사


        버려진 식탁
                        

        언젠가 식탁을 하나 샀다. 꽃병
        속에 꽂혀 있던 꽃들이 시들어
        몇 차례 버려졌다. 그리고
        꽃병 속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 의해 꽃병은 엎질러지기 시작했다.

        처음, 의자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가.
        식탁은 저녁을 위해 차려진 적이
        있었다. 의자들은 이 방
        저 방으로 흩어졌다. 벗어놓은 옷이
        뒤집혀, 의자 위에 쌓였다.

        한 방에서 일일 연속극이 시작되고
        한 방에서 흘러간 노래가 흘러나왔다.

        식탁 위엔 신문지와 영수증,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 봉지가
        올려졌다. 한때는, 그곳에서 양파를 기른 적도 있었다.
        양파 줄기는, 잘라내자마자 다시 자라났다. 점점 가늘어져
        창문에 가 닿을 듯했다.

        말라비틀어진 양파 줄기 위에
        더 많은 신문이 던져졌고,
        영수증과 프라스틱 용기와 비닐 봉지가 쌓여갔다.
        
        검은 비닐 봉지 속에서,
        많은 과일들이 썩어나갔다.

        어느 날 저녁, 그것들을 들어냈다.
        몇 해 전에, 야유회에 가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오랫동안 유리 밑에 깔려 있었으나, 놀랍게도
        사진 속의 얼굴들은 잔디밭에 앉아 웃고 있었다.





[감상]
버려진 것에 대한 시각이 새롭습니다. 식탁의 일생을 보는 것이랄까요. 그러한 모습에서 마지막 사진 한 장의 처리는 무언가 읽는이로 하여금 깨달음을 줍니다. "놀랍게도/ 사진 속의 얼굴들은 잔디밭에 앉아 웃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사멸되는 것들에서 피어나는 황홀한 생명의 흔적. 잔잔한 흐름 속에서 내가 버렸던 것들이 생각나는, 아님 내가 버려지면서 떠올려지는 바람 부는 화창한 날이네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11 싹 - 김지혜 2005.12.27 2666 266
1110 기린 - 구광본 2001.05.14 1364 266
1109 부서진 활주로 - 이하석 2001.05.12 1284 266
1108 저수지 - 김충규 [1] 2001.05.10 1370 266
1107 Y를 위하여 - 최승자 2001.08.10 1699 265
1106 풀잎 다방 미스 조 - 정일근 2001.06.27 1414 265
1105 몽대항 폐선 - 김영남 2006.06.08 1380 264
1104 날아라 풍선 - 마경덕 2005.07.30 2169 264
1103 퍼즐 - 홍연옥 [1] 2004.03.02 1733 264
1102 방생 - 이갑수 2001.06.05 1213 264
1101 무인 통신 - 김행숙 2001.08.08 1425 262
1100 만월 - 정지완 2001.05.26 1316 262
1099 가물거리는 그 흰빛 - 이근일 2006.06.05 1653 261
1098 편지에게 쓴다 - 최승철 2001.05.22 1611 261
» 버려진 식탁 - 이윤학 2001.05.11 1355 261
1096 후문 - 김병호 2006.06.01 1558 259
1095 가을날 - 이응준 2002.09.26 3600 259
1094 사랑니 - 고두현 [1] 2001.07.11 1841 258
1093 그 날 - 이성복 2001.05.30 1622 257
1092 섬 - 조영민 [6] 2001.08.07 2047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