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안을 걷다》 / 김병호/ 《시작》시인선
후문(後文)
마른 가지에 줄긋고
순한 죽음 기다리는 늙은 거미와
낮달 자국을 따라
푸르게 돋는 저녁별이
서로 스미지도 못하고
뭉개지도 못하고
한참 전생을 서성이듯이
들창 너머의 노을은
해안선을 밀어 폐선에게 건네주고
폐선은 다시 늙은 거미에게 곁을 내어주는데
미처 서녘에 오르지 못한 것들이
어제보다 시무룩하게 핀 해당화 그늘을 헤쳐
제 몸을 묻을 때
거미는 제 걸음으로 별자리를 놓는다
그새,
삼베 고의적삼 같은 어둠 한 질이
모래톱에 지어진다
[감상]
거미와 저녁별, 노을과 폐선이 어우러져 한 폭의 시가 되었습니다. 하루의 후문은 해질 무렵이 아닐까 싶은데, 그 문을 열고 나가면 풍경들이 서로에게 의지하거나 반응하며 밤을 맞이하는군요. <푸르게 돋는>, <어둠 한 질> 등의 행간에서 더욱 서정이 깊어집니다. 오후부터 저녁까지 바닷가 어느 처마를 들여다보는 순하고 착한 눈빛이 떠올려지는 것이어서, 나도 <그늘을 헤쳐/ 제 몸을 묻을>줄 아는 저녁에 가보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