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 정승렬/ 한국문학도서관 문학서재
아지랑이
허기진 배 움켜잡고
황량한 벌판을 내닫던
겨울바람 사이로
진달래꽃 개나리꽃 그리며
수런수런 피어나는 얼굴들
보일 듯 말 듯
고운 가슴속으로
환상의 그림자 되어
다가오는 그리움
두꺼운 얼음장 속에서
차가운 속살 터쳐가며
봄으로 환생하는 두려움
지금, 연둣빛 햇살이
쏟아지는 들판에는
투명한 눈빛들이
여기 저기서 꽃대처럼 피어나
두꺼운 바람벽을
한 겹 두 겹 벗겨 내고 있다.
[감상]
꼿꼿하거나 이리저리 흩어진 가는 가지들에서 노랗고 빨간 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시는 봄이 오는 과정을 그리움과 두려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봄 아지랑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너울거리며 풍경을 일그러뜨리는데, 그 이유를 이 시는 "바람 벽"을 "벗겨 내고 있다"는 절묘한 표현으로 대신합니다. 꽃이기 이전에 다 나무이고 가지이지만 정확히 제 주소를 기억하여 피어나는 꽃들은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