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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 2 - 심보선

2002.04.02 15:13

윤성택 조회 수:1111 추천:183

성장기 2/ 심보선/ 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성장기 2    


           1

           나는 지금 유언장을 몇 번 접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는 너무 젊었으나
           내 주위에는 늙디늙은 비밀들이 가득하다
           나는 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한다


           2

           이후
           나는 성장했다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갔다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집 마당에는 낙엽송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바람이 불면 가지들은 미친 듯이 성호(聖號)를 그어댔다
           나도 그 나무처럼 뿌리로부터 너무나 먼
           팔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발 끝에서 그림자가 새 나왔고,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자 새 한 마리가
           배꼽을 쪼다가 푸드득 날아갔다
           나는 자주 자전거를 끌고 여의도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 길엔 층계참에 쭈그리고 앉아
           그림자가 몇 번 접혔는지 세어 보았다, 이후

           나는 성장했다
           길바닥에서 처음보는 물건들을 자주 주웠다
           항상 적, 재, 적, 소, 에서 웃거나 울었다
           그림자를 보면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었다


           3

           나는 지금 참혹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지금 내 유언장이 몇 번만에 펼쳐질 것인가를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지병이었다
           그리고 같은 의자 위에 앉아 나는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고백해 왔다





[감상]
조금은 낯설은 듯 싶으면서도 한 인물의 성장과정을 찬찬히 지나갑니다. "나는 성장했다"라는 말, 새삼 가슴에 와 닿는군요.  초등학교 때 일년에 10cm 커가면서 마음 또한 어질어질 했던 시절. 이런 유언장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 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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