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 2/ 심보선/ 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성장기 2
1
나는 지금 유언장을 몇 번 접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는 너무 젊었으나
내 주위에는 늙디늙은 비밀들이 가득하다
나는 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한다
2
이후
나는 성장했다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갔다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집 마당에는 낙엽송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바람이 불면 가지들은 미친 듯이 성호(聖號)를 그어댔다
나도 그 나무처럼 뿌리로부터 너무나 먼
팔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발 끝에서 그림자가 새 나왔고,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자 새 한 마리가
배꼽을 쪼다가 푸드득 날아갔다
나는 자주 자전거를 끌고 여의도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 길엔 층계참에 쭈그리고 앉아
그림자가 몇 번 접혔는지 세어 보았다, 이후
나는 성장했다
길바닥에서 처음보는 물건들을 자주 주웠다
항상 적, 재, 적, 소, 에서 웃거나 울었다
그림자를 보면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었다
3
나는 지금 참혹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지금 내 유언장이 몇 번만에 펼쳐질 것인가를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지병이었다
그리고 같은 의자 위에 앉아 나는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고백해 왔다
[감상]
조금은 낯설은 듯 싶으면서도 한 인물의 성장과정을 찬찬히 지나갑니다. "나는 성장했다"라는 말, 새삼 가슴에 와 닿는군요. 초등학교 때 일년에 10cm 커가면서 마음 또한 어질어질 했던 시절. 이런 유언장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 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