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쉬는 여자, 오늘 꽃을 버렸다/ 정재학/ 『작가세계』로 등단
나를 숨쉬는 여자, 오늘 꽃을 버렸다
나는 기타를 치고 있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여자의 몸은 음표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사람이 연주한 음악만을 듣는다 여섯 현(絃)에 그녀의
목소리가 미끄러진다 그때마다 죽은 누나가 흙이 되지 않고 나에게 걸
어 들어온다 누나가 얼음을 멜로디에 떨어뜨리자 얼음이 깨져서 허공으
로 튀어오른다 어머니는 누나를 높이 치켜들었다 옷에서 마른 풀들이
떨어지고 누이는 어머니에게 안겨 환하게 웃는다 나는 늘 내 한쪽 눈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녀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굳어진 손가락이 기타
줄을 뜯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누나는 자꾸 나보다 어려지고 정원은 점점 작아져 갔다 조그만 발자국
들은 더 이상 춤추지 못한다 선명하게 흩어지는 음들이 내 몸을 도려내
고 기타줄이 녹기 시작한다 나는 떨어지는 현들을 삼킨다 목에서 낯선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뱃속에서 꿈틀거리던 변성화음이 베인 자국
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누이는 그것들을 자신의 팔에 바른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되지 못한 딸을 가슴에 묻고 눈뜨지 못하고 내 손을 잡은 아버
지의 손도 눈뜨지 못했다 하루종일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감상]
기타를 치다가 잠들었을까. 잠든 화자의 꿈 속 여인이 죽은 누이가 되어 점점 가족의 편린들로 중첩됩니다. 이 시는 의식의 흐름을 끝까지 좇아가며 내면의 아픈 자아를 드러냅니다. 누나, 내 연주 듣고 있어? 누나가 있는 곳은 볕좋은 무덤이잖아. 그래서 누나가 일어서면 "옷에서 마른/ 풀들이 떨어지"잖아. 나는 이제 변성기를 지났어. 그리고 나, 기억 속 누나보다 더 크고 있어. 그래서 누나가 자꾸만 어려져 보여. 아아, 내 안의 여자는 자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