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자전거가 있는 바다/ 손택수/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외갓집 소금창고 구석진 자리에 낡은 자전거 한대가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녹이슬었지만, 수리하면 쓸 만하겠는걸. 아마도 나는
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쌩쌩 미끄러져 다녔을 은륜의 눈부신 전성
기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논둑길 밭둑길로 새참을 나르고 포플러 푸
른 방둑길 따라 바다에 이르던 시절, 그는 아마도 내 이모들의 풋풋한
젊은 날을 빠짐없이 지켜보았으리라. 읍내 영화관 앞에서 빵집 앞에
서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다, 아카시아 향기 어지러운 방둑길로
푸르릉 푸르릉 바큇살마다 파도를 끼고 굴러다니기도 했을, 어쩌면
그는 열아홉 꽃된 처녀아이를 태우고 두근두근 내 아버지가 될 청년
을 만나러 가기도 했으리라. 바다가 보이는 풀밭에 누워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 썰물져가는 하모니카 소리에 하염없이 젖어들기도 하였
으리라. 그때 풀밭과 바다는 잘 구분이 되질 않아, 멀리서 보면 그는
마치 바다에 누워 즐겨 꿈에 젖는 행복한 몽상가로 보이지 않았을까.
첫사랑처럼 한 번 익히고 나면 여간해선 잘 잊혀지질 않는 자전거, 손
잡이 위의 거울 먼지를 닦아본다. 거울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나를 품
고 있었다는 눈치다. 턱없이 높은 앉을깨 위에서 페달이 발에 잘 닿지
않는다고 툭하면 투정을 부리던 철부지 아이를, 맥빠진 앞바퀴 뒷바
퀴 타이어에 바람 빵빵 밤 늦도록 소금자루 같은 달을 태우고 비틀대
던 방둑길을.
[감상]
아, 상상력이 맛깔스럽습니다. 즐겁고 신나는 상상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시가 끝이 나서 아쉽구나 싶습니다. 손택수라는 시인, 기억해 두어야겠다, 시집이 나왔을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첫사랑처럼 한 번 익히고 나면 여간해선 잘 잊혀지질 않는 자전거". 국민학교 시절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이웃집 대문을 찌그러뜨리고 무릎 깨진 채 같이 절뚝이며 달아났던 내 자전거야.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니. 고요히 녹슬어갔을까. 아니면 단단한 쇠붙이로 환생하여 지상 어딘가 내 사춘기처럼 햇볕을 튕겨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