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2002.01.31 11:11

윤성택 조회 수:1062 추천:198

옹이가 있던 자리/ 이윤훈 /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옹이가 있던 자리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튀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감상]
신춘문예 당선시집을 읽고 있는데, 읽는 순간 물건이다 싶을 정도로 수사와 주제가 조화롭게 유지된 시입니다. 옹이 하나가 빠져나간 구멍으로 아이가 보는 세상을 이 시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조명하고 있습니다. 소외된 삶에 관한 편린들이, 나이 드신 분들이 참 좋아할 소재로 되어 있고요. 뒷심도 제법 있는 것이 "목관"의 등장입니다.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는 죽음을 직시하는 동시에, 죽음 저편을 환한 빛으로 아우르고 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91 프랑켄슈타인 - 김순선 2004.06.17 1088 174
190 처용암에서 1 - 김재홍 2003.09.24 1088 195
189 브래지어를 풀고 - 김나영 2011.01.12 1087 78
188 연두의 시제 - 김경주 [1] 2009.12.02 1087 119
187 공중부양 - 박강우 2004.04.12 1087 225
186 참붕어가 헤엄치는 골목 - 김윤희 2003.01.29 1087 196
185 선명한 유령 - 조영석 2004.11.15 1086 165
184 움직이는 정물 - 김길나 2003.09.26 1086 183
183 음암에서 서쪽 - 박주택 2002.09.24 1086 240
182 자유낙하운동 - 권주열 2003.12.20 1084 205
181 어도 여자 - 김윤배 2007.06.07 1083 138
180 건조대 - 최리을 2002.03.25 1081 180
179 서치라이트 - 김현서 [2] 2007.03.13 1080 168
178 과월호가 되어 버린 남자 - 한용국 2004.06.21 1080 188
177 오래된 가구 - 마경덕 2003.03.10 1080 200
176 고가도로 아래 - 김언 2003.07.09 1079 221
175 배꼽 - 이민하 2002.12.02 1078 191
174 밤의 편의점 - 권지숙 2011.01.20 1077 99
173 싸움하는 사람을 보다 - 박진성 2002.11.21 1077 178
172 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 - 김승원 [1] 2002.12.11 1076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