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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타이어가 있는 산책길 - 최영숙

2002.02.19 10:09

윤성택 조회 수:1137 추천:188

『골목 하나를 사이로』/ 최영숙 / 창작과비평사



        폐타이어가 있는 산책길



        종점, 길은 언제나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막막하게
        생의 변두리를 도는 자
        외곽에서 중심을 구하는 자의 배경에는
        벌판과 바람 길은 휘어져
        어디에 닿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삶은 단지 스쳐가거나 봄볕에
        살을 말리는 뿌연 것,
        어느날 아주 먼 어느날
        우리가 인연이라 말하던 순간도 다 쓰고 나면
        바람 빠진 폐타이어 닳아진 허울만 남아
        한곳에 쌓일 것이다 재생의 날을 기다리며
        우연한 봄날의 담에 기대다 보면
        지나온 길의 어디쯤 진실도 있었다고, 말해주는 것들
        먼지를 풀풀 날리며 덤프트럭이 지나고
        갓 스물의 청춘이 노래한다 마른 연기
        피어오르는 들판의 한끝 희망은 그런 대로
        연명하기에 좋았으나 몸의 바퀴가 닳아 멈추었을 때
        내 앞에 놓인 밥그릇 하나,
        햇살이 가득 담긴 사발을 놓고 조는 듯 깨이는 듯
        등허리며 머리카락 사이로 따뜻한 기운이 흐르고
        길은 그때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감상]
"연명한다는 것, 나는 멀리 떠나왔다. 이제 다시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오직 무덤을 향해 질주하는 시간에게 멀미를 느낄 뿐."이라고 제가 시집에 적어 넣었던 글을 다시 읽습니다. 소외된 것에 대해 詩는 관심이 많습니다. 어쩌면 그 소외된 것들에게서 세상을 읽으며 점자책처럼 희망을 더듬고 싶은 지도 모릅니다. 이 시는 볕 좋은 담에 쌓아 올려진 폐타이어에게 청춘을 묻습니다. 이 질문은 폐타이어에게서 우리의 세월을 읽는 동시에, 소멸해 가는 것에 대한 아련한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 길은 시작이라고 지나는 소녀의 콧노래에 멈칫, 졸고 있던 개가 컹컹 짖어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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