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의 잠을 빌려』/ 심재상 / 문학과지성사
수도관은 한겨울에만 꽃을 피우고
누군가 마지못해 이 세상에 머무는 작자가 있는 모양
이다. 한 웅큼의 진눈깨비가 종일 흩날리더니 마지막 한
숨인 양 이윽고 바람 소리 그쳤다. 아니다. 밤새 겨울의
고집 센 영혼이 냉랭한 수도관을 채우고 그 끝에서 벙글
었다. 석류처럼 허깨비처럼
넉넉히 고여 자신의 깊이가 되지도 못하고 소복이 쌓
여 자신의 지붕이 될 수도 없었던 푸석한 서른 몇 해,
그 무엇이 헛도는 바람개비처럼 동파된 진실처럼 끈질
기게 내 주위를 밝혀온 것일까. 내 어둠의 심지는 어디
있을까. 이윽고 파이프 수리공의 무거운 발소리가 천천
히 내 몸 속의 계단을 걸어올라왔다.
[감상]
"나이 서른에 우린∼"이란 노래를 불렀던 고교시절이 있었는데, 돌아보니 서른이군요. 고교시절 서른을 삶의 어떤 완성의 시기로 보았던 노래였을까요. 참 늙은 나이 서른으로 생각했더랬는데, 왜 저에게는 서른에게서 쓸쓸함이 묻어날까요. 이 시를 읽으면 육화(肉化)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또 수도관을 점철되는 한 사내의 삶도 느껴지고요. 글쎄요, 입에서 항문으로 수많은 것들이 흘러갔던 것처럼, 이 겨울 동파되지 않도록 그리움이라는 수리공을 불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