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겨울 밤에 시쓰기 - 안도현

2002.02.23 11:42

윤성택 조회 수:1601 추천:181

『외롭고 높고 쓸쓸한』 / 안도현 / 문학동네



        겨울 밤에 시쓰기


        연탄불을 갈아 보았는가
        겨울 밤 세시나 네 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안 일어날 수도 없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부비며 드르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어 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 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기로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연탄집게 한번 잡아 보지 않고 삶을 안다고 하지 마라,
        이렇게 썼다가는 다시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내다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 선 증기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느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수출자유지역 귀금속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 하고 왔거나
        술 한잔 하고는 좆도 씨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식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두고
        연탄냄새에게 자기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등바등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어서
        나는 그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속을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겠다
        낮은 곳으로 자꾸 제 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밤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 보면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는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흰 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감상]
요즘 연탄을 때는 집이 어디 있을까 싶다가도, 글 쓰는 친구들 한번 읽어보자고 어차피 연탄구멍 맞추듯 삶을 맞춰온 게 아니냐고 읽어나 보자고 하고 싶은 시입니다. 시장 어귀에서 혼자서 자취하던 대학시절, 보일러 기름을 배달시키는 것보다 직접 받아다 넣는 것이 싸고 양도 많다는 주인의 말에 목도리 질끈 메고 골목에 세워 둔 양씨 아저씨 리어커 빌려 끌고 나섰습니다. 약국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임을 알아보더라도 까짓 것 청춘아! 하면서 주유소로 내달렸습니다. 리터기 돌아갈 때 이 기름이 겨울밤 내 등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녀석들이구나 싶고, 덜컹덜컹 싣고 올 때 마개에서 조금씩 새는 기름이 아까워 천천히 오르막을 피해 먼길을 돌아왔습니다. 겁나게 추운 날, 옥상에 올라가 보일러통 기름 양을 살피면서 조마조마 했던 밤들이었습니다. 그 겨울밤에 나는 무엇을 했을까. 한쪽 벽면에 원고지 압정으로 꽂아 놓고, 내 마음도 꽂아 놓고. 전공을 버리고 다시 시작한 이 짓이 잘한 일이라고, 더 늦기 전에 청춘 앞으로 꺼내 놓은 詩들이 기특하다고. 정말 하고 싶은 일 하다 죽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인생이냐고. 하중과 모멘트 그리고 시멘트 배합비로 공치며 지낸 몇 년을 헐값에 처분해도 괜찮다고 했던 날들. 어쩌면 지독히도 외로웠고 무언가 한없이 그리웠던 밤. 살아야겠다고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썼던 겨울밤. 문득.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91 버리고 돌아오다 - 김소연 2002.03.06 1173 184
190 그가 두고 온 빈집에선 - 이정록 2002.03.05 1219 178
189 커브가 아름다운 여자 - 김영남 2002.03.04 1194 200
188 나무를 생각함 - 최갑수 2002.02.26 1295 177
» 겨울 밤에 시쓰기 - 안도현 2002.02.23 1601 181
186 푸른 사막을 보고 오다 - 권현형 2002.02.22 1412 182
185 수도관은 한겨울에만 꽃을 피우고 - 심재상 2002.02.21 1133 215
184 귀향 - 박청호 2002.02.20 1187 195
183 폐타이어가 있는 산책길 - 최영숙 2002.02.19 1137 188
182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2002.02.18 1203 186
181 여주인공 - 이희중 2002.02.16 1070 173
180 허불허불한 - 김언희 2002.02.15 1092 177
179 봄나무 - 최창균 2002.02.14 1323 173
178 공감대 - 연왕모 2002.02.07 1109 180
177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 손택수 2002.02.06 1260 178
176 왼손의 사랑 - 정끝별 2002.02.04 1538 182
175 연애에 대하여 - 이성복 2002.02.01 1638 184
174 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2002.01.31 1062 198
173 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수련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장석원 2002.01.30 1102 199
172 수선집 근처 - 전다형 2002.01.29 1116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