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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두고 온 빈집에선 - 이정록

2002.03.05 18:22

윤성택 조회 수:1219 추천:178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 이정록 / 문학동네



        그가 두고 온 빈집에선
                

        1
        사람이 떠나도 해마다
        봉숭아는 씨앗주머니를 부풀린다
        빗물에 싱거워진 장독대에
        잡초 무성한 정적(靜寂) 위에
        장난처럼 꼬투리를 터트린다
        고추잠자리가 잠깐 날개를 고쳐 앉을 뿐
        무너진 굴뚝도, 선 끊긴 안테나도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망초꽃 우거진 안마당까지
        퉁퉁 부은 관절로 봉숭아가 서 있다
        사람이 떠났어도 해마다
        마루턱에 탑을 쌓는 제비똥을 보며
        낼름 꽃술을 내미는 복숭아
        버즘이 핀 잎사귀에
        잠시 물기가 돈다


        2
        키다리꽃처럼 담장을 넘보다가
        빈 깍지만 싣고 떠나온 부끄러운 이사
        씨앗은 멀리 터트려야 한다며 마음을 달랬던
        그는 이제 호박 속보다도 밝은 조끼를 입고
        물꼬를 보듯 새벽일 나가는
        환경미화원, 가연성 쓰레기통에서
        불에 그을린 알미늄캔을 꺼내다가
        텃밭에 묻은 돼지새끼를 떠올리는,
        차령산맥 끄트머리에서 튕기친
        귀 떨어진 문패, 그가 새벽안개를 헤치고
        쓰레기통에 상반신을 넣었을 때
        종을 울리듯 당목(撞木)처럼 달려든
        ……트럭……혼미한 의식 너머로
        일제히 터지는 봉숭아 꼬투리,
        그때 두고 온 마을 빈집에선
        탱자나무를 타고 오른 하눌타리가
        진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봉숭아는 빈 깍지만 말아 쥔 채
        입추(立秋)를 맞고 있었다
        


[감상]
고향을 떠나와 환경 미화원을 하는 "그"가 트럭에 치여 사고를 당합니다. 이 시는 그 과정, 그러니까 그가 떠나온 고향의 아름다움과 회한 등이 느껴집니다. "그는 이제 호박 속보다도 밝은 조끼를 입고"의 비유에 그만 마음의 현이 울립니다. "봉숭아"와 "그"를 적절히 환치시키며 긴장을 유지한 것도 좋고요. 사고를 당하는 순간 "일제히 터지는 봉숭아 꼬투리"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들고 있던 쓰레기 봉투가 찢어진 것일까, 그의 심장 가까운 곳에서 피가 흐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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