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부지2』/ 유현숙/ 동양일보 2002년 신춘문예 당선작
고수부지2
내 몸은 지장물을 다 비워낸 고수부지이다
큰 물이 날 때에나 강은 내 어깨를 잠시 빌리며
저 혼자 하루를 도도히 흘러간다
물이 빠져나간 그 자리엔 밀려 온 세월 하나가
상흔처럼 뒹굴고 있다
급하게 달려 온 저 물길은 이제
강의 하류 어디쯤에서 노곤한 몸 풀고 싶은 것일까
제 몸에서 흘려 놓은 것들 미처 쓸어담지 못하고
서둘러 떠난다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간 물길은 저기 어디
산하를 지나가다 그리운 안부 하나쯤 부쳐 줄런지
때로 급류에 떠밀린 적이 있었다해도
한때 신세졌던 내 어깨 한 켠을 잊지 말기를
욕심내 보는이 청맹과니 같은
그대가 빌려 쓴건 어깨 뿐이라는데
나는 왜 가뭄에 배 터진 논배미처럼
쩍쩍 갈라진 채 전신을 앓고 있는가
[감상]
이 시는 고수부지와 강, 그리고 세월이 어우러져 하나의 단아한 풍경을 자아냅니다. 고수부지의 어깨로 이어지는 의인은 단순히 '어깨를 빌리다'에 그치지 않고, "산하를 지나가다 그리운 안부 하나쯤 부쳐 줄런지"까지 이릅니다. 당선작답게 군살 없이 매끈한 문장의 흐름이 좋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그대"의 등장은 고수부지와 우리네 삶까지 아우르는 결말로 환기의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큼한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