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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가 달에 간 날 - 윤이나

2002.01.11 10:42

윤성택 조회 수:1400 추천:211

토끼가 달에 간 날 / 윤이나 /『시와반시』2001 겨울호




             토끼가 달에 간 날          


        1
        어제 저녁 내가 먹다 남긴 피자 조각 위의 소세지들이
        아침부터 안방구석에서 번식을 시작했다
        엄마가 시집 올 때 해 온 베이지 색 장롱의 문을 뜯어
        암퇘지 한 마리가 우리를 만들고 그 곳에 들어앉아
        동글동글한 비엔나 소세지를 생산하고 있었다
        나 암퇘지 몰래 그것들을 몇 개 튀겨 먹고 출근을 했다

        2
        버스 정류소에서 머리에 꽃을 심은 김과장을 만났다
        사람들이 매일 대머리라고 놀려댔더니 머리에 꽃을
        심어왔다 난 오히려 잔디가 더 어울릴 뻔했다고
        심각한 얼굴로 충고했다 그러자 김과장의 입에서
        복숭아 두 개가 굴러 나왔다 통근버스에 밤나무들이
        타고 있었다 얼마나 따끔거리고 시끄럽던지 운전사는
        나무의 허리통을 오려내 의자를 만들어 버렸다

        3
        아침나절에 내 책상 위에 커다란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발신인은 귀먹은 노인이었다
        열어보니 내가 교보문고 앞길에서 세 번 울린 자동차
        경적소리였다 난 깜짝 놀라 그 노인의 보청기를 빌려 썼다
        내 귓바퀴가 자동차 바퀴가 되자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난 얼른 서랍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4
        점심시간에 박 지은씨가 하얗게 질려 식당으로 뛰어왔다
        배낭에 절구통 하나를 넣은 토끼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달에 가려나, 사무실로 들어가니 한 마리의 토끼와
        몇 마리의 토끼가 서로 붙어 주먹질이었다
        난 잘 아는 늑대에게 전화를 했다 이빨이 다 빠진
        늑대가 찾아왔다 그 사이, 놀란 몇 마리의 토끼는
        집으로 돌아갔다

        5
        오후에 핸드백에 나 있는 푸른 이빨자국에 국화가 만발했다
        국화를 몇 송이 꺾어 김과장의 책상에 꽂았더니 김과장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김과장은 내게 울먹이며 고맙다고만 했다
        김과장의 마누라는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난 해를 뚝 따다 달과 반쯤 섞어 양푼에 넣고 쓱싹 쓱싹
        반죽을 했다 그 다음 동그스름하게 빚어 다시 하늘에 갖다 놓았다

        6
        퇴근길 구두에 붉은 반점이 돋았다 동백 마트 옆
        구두 병원의 의사가 며칠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병명은 스트레스성 과대망상. 당분간 푹 쉬고
        약물치료를 받으면 곧 괜찮아 질 것이라고 한다
        나 맨발로 집에 돌아왔다



[감상]
낯섦에서 오는 친숙함. 우선 이 시는 재미가 있습니다. 프로이드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잠재된 혹은 억눌린 본능과 무의식을 시에서 구현해 냈다고 할까요. 어쩌면 시 속의 상황들은 현실의 또 다른 시적 반영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가 좋은 이유는 현실과 시적 상상력을 동질화시킴으로서 문학적 깊이를 드러낸 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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