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 이갑수 / 민음사
요약
모든 일은 시작하는 순간 반으로 요약된다
배부름은 첫술에 요약되어 있다
어떤 술도 그 맛은 첫잔과 마주한 사람이 나누어 좌우한다
귀뚜라미는 소리로서 그 존재를 간단히 요약한다
평행한 햇살을 요약하여 업은 잎사귀 하나 아래로 처지고 있다
방향은 가늘게 요약되어 동쪽은 오로지 동쪽만을 묵묵히 담당한다
요란한 것들을 집합시켜 보면 사소한 것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물질은 한 분자에 성질을 전부 요약하여 담는다
한 방울 바닷물이 바다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서해는 서해를 찾아드는 모든 강의 이름을 요약한다
목숨은 요약되어 한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다
파란만장한 생애는 굵고 검은 활자로 요약되어 부음란에 하루 머무른다
하루살이는 일생을 요약하여 하루에 다 산다
너는 모든 남을 요약하여 내게로 왔다
[감상]
"요약"이라는 말에 담겨져 있는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발상의 참신함이랄까요. "너는 모든 남을 요약하여 내게로 왔다"라는 망설임 없는 직관력도 좋고요. 그렇다면 나는, 혹은 당신은 타인에게 어떻게 요약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