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 서영채 / 제3문학사
시쓰기의 즐거움
창 밖으로 스쳐가는 세상은 언제나 형용사일 뿐이었다 그 가슴 한복판엔 푸근한 가을 강물이 흐르고 있지 낙엽 두 세 장이 동동 떠가는, 세상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었을 때 어느덧 겨울이 오고 내 시야는 온통 정방향의 명사들로 가득차오더라 거친 바람이 지날 때에도 하얗게 눈이 내린 새벽이면 더더욱이, 후후 한숨도 용납될 수 없었지 턱턱 숨이 막힐 때면, 어쩌겠어 손마디에 박힌 굳은 살처럼 세상을 도려내버릴 수밖에
하지만 우리가 더 오래 못박힌 가슴들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럴 거야 바다의 잔등에서도 아스팔트의 구갑에서도 우리 발 밑에서도 쑥쑥쑥쑥 칼날같은 동사들이, 세상이 솟아오를 거야 더 오래오래 우리들의 가슴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대, 무수히 손베이고 만신창이 된 가슴에서 마침내 한 자루 날선 싯푸름이 나를 향해 날아온다면 내 심장이야 기꺼운 과녁일 뿐이겠지 뜨겁고 맑은 세상이 내 몸에 그득할 텐데 그대가 비수가 아니라 한들 그야 또 무슨 상관이겠어
[감상]
문학평론가의 시집이지요. 단 한 번도 시집을 내셨다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성한 소문만 있었을 뿐.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청계천에서였던가 옛날 서적 틈에서 "태풍"이라는 시집을 발견했답니다. 그 중 한 권이 어찌어찌하여 나에게까지 흘러왔습니다. 그 시집을 처음 읽었던 날이 생각납니다. 시집 곳곳에 독재와 처벌, 감시의 80년대 시대가 그러하듯 스물 아홉 청년이 겪는 상처들이 아슴아슴 배여 있었습니다. 이 시는 "형용사"가 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현실을 암시해내는 동시에, "그대"라는 시적상관물을 통해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에 대한 의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남겼던 후기에 이런 말이 인상적이군요. "시는 그저 딴지를 경제적으로 거는 짧은 글일 뿐이다. 연과 행 구분의 의미는 그 딴지 걺에 있으며 그렇지 않은 연과 행 구분은 시임의 불필요한 신분증이고 시이기 위해 있어야 하는 말과 말 사이의 심연을 위해 어거지로 긁어놓은 얇은 수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