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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행 - 허연

2002.01.18 11:51

윤성택 조회 수:1126 추천:186

『불온한 검은 피』 / 허연 / 세계사




              
         벽제행          


                1
        올해 드물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벽제엔 키 큰 나무들이 살지 않는다
        눈발을 날리는 바람이 있을 뿐
        몇 번을 지나쳐가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죽음일지도 모른다
        군용 트럭에 실려온 앳된 초상肖像이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울시립장제장
        산들이 보이는 앞에서
        한없이 작은 눈송이들이
        바닥에 떨어져 울고 있었다


                2
        억울해서 어떡하냐며
        서럽게 우는 건 항상 여자들이지만
        그것을 보고 입술을 깨무는 건
        이곳에선 남자들의 일이다
        돌아서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눈을 맞는다

        울기 위해 살자
        살아서 천천히
        이 길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
        

                3
        꽃들이 얼어붙고 있었다
        벽제에서는
        사람들이
        하늘을 자주 올려다본다
        부르지 못한 이름들이
        어두운 하늘에 가 박힌다
        누가 올라왔던 길을
        내려다본다
        여기에 몸을 누인 사람들은 많지만
        잠든 사람은 아무도 없다


                4
        벽제에선
        아이들도 말을 하지 않는다
        문조차 소리내어 열리지 않는다
        침묵해야 한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첨탑 위의 새들도
        이곳엔 앉지 않는다
        너무 오래 말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두워진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음을 어루만질 수가 없다


                5
        눈이 그치고
        검은 굴뚝이 하늘로 걸어간다
        사람들의 어깨에 힘이 없다
        살아서 술을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꾸 뒤돌아본다
        하지만 이곳엔
        손댈 것도
        가지고 갈 것도 없다
        
        돌려주어야 할 슬픔은 넘치는데
        다 버려두고 가야 한다
        살아서
        느린 걸음으로 가야만 한다




[감상]
벽제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이 시는 장례의 시각에서 보는 벽제의 어느 겨울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발설하는 내용마다 제각각 설득력 있는 직관이 돋보입니다. 군에 있을 적, 허연의 시집을 아껴서 읽었던 기억이네요. 젊음, 방황, 노동에 관한 편린들이 이 시집 곳곳에 살아 있습니다. 다시 그런 겨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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