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 정원』/ 박경원 / 민음사
먼지 2세
다시 세월의 입자로 태어나기 위해 난 수많은 시간을 말렸다
돌처럼 단단한 기억을 끌어안고서 건조한 사막을 건넜다
낡은 사진틀 속,
먼 조상의 눈빛이 되어 망각의 후예들이 오르내리는 계단을 환상처럼 지켰다
열린 창들마다 5월의 습기들이 엄습했다
약속에 쫓긴 수많은 향기들이 발을 헛딛듯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은 먼지가 아니라 먼 조상의 눈빛,
흑백의 무덤덤 속에 기생하는 일종의 무료함일 뿐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건조함을 가다듬고 현실의 입면체에 이마를 맞대는
길고도 지루한 숙명이 거듭된다
거대한 여행을 떠나는 꿈 그들의 먼 조상의 유언처럼 윤회의 가문에서
새로이 죽고 싶은 꿈, 5월이 엄습했고
흑백의 습기들은 내 안의 시력을 더욱 침침하게 가라앉힌다
그건 내가 알고 그들의 먼 눈빛이 알 뿐이다
망각의 시간 속에 갇힌 그들의 먼 유언이 알고
그 건조한 침묵을 털고 일어서려는 나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먼지다 아직은 자유롭지 못한 현실 속 환상이다
곧 창가로 다가가 6월의 가족사를 환기할 수도 있고, 햇살은 참 위태롭다
[감상]
참 끌리는 화법입니다. 낡은 사진틀에 쌓이는 먼지를 마치 신화를 읽듯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가 좋은 이유는 열린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밀한 먼지에 대한 것이지만, 그것을 토로하는 발성법은 한껏 열리고 트인 시선입니다. "길고도 지루한 숙명"이라는 추상성을 현실과 잇대어 놓는 묘사력도 탁월하고요. 시적공간이 넓고 깊어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