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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 - 박상수

2001.10.26 10:15

윤성택 조회 수:1425 추천:191

동서문학 / 박상수 / 『동서문학』 2000년 가을호


             반지
                                  
           이별의 배경은 언제나 밤이다
  
           이를테면 여자가 따라오고 있었지만
           곧 떠날 것이다 여자는
           안국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남자는
           돌아본다 그녀가 다시 웃을 것만 같다 낯선 정류장
           몸을 웅크리고 하늘로 떠오르는 몇 개의 비닐봉지를 쳐다본다
           그는 그러니까 한동안 해외에 있었다 서양 애들이 코로
           마약하는 도시에서 반지를 샀다 음각의 주술 무늬가 새겨진,
           그것은 손독 오른 고름처럼 커져 고국으로 돌아갈
           주문이 되었다 날마다 남자는 입 속에서
           여자를 중얼거렸다 입이 헐도록 중얼거렸을 때
           고국은 겨울이었다 여자는 반갑게 나왔다
           그것은 무서운 일 수줍음도 없는, 낯가릴 것도 없는
           관계의 시작, 정말로 짐작하지 못했다
           여자는 왜 자신이 반지를 받아야 하는지
           우습게도 반지마저 그녀의 손가락에 헐거웠던
           사실을, 맞지 않는 반지를 손에 끼우고
           깔깔깔 여자는 웃었다 수습하기 어려운 사실을
           어디에도 맞지 않고 어긋나는 기대를,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리고 돌아서는 이 외딴 인생을
  
           말하자면 이별은 즐거운 시간이다
           헐렁한 반지를 되돌려 주며 손 흔드는 일이다
           여자는 웃으며 떠났지만 밤 하늘엔
           검은 봉지들이 떠다닌다 남자는 드디어
           참았던 웃음을 토해 낸다 화농처럼 뚝뚝 떨어지는,
           떠나간 버스조차 보이지 않을 때 남자는 자신의 손에
           반지를 끼운다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자신을 껴안는다
  
           때는 겨울이고 추운 밤의 일이었다.

[감상]
첫 줄을 보고, 시를 직감합니다. 그래서 첫행은 마음의 대문입니다. "이별의 배경은 언제나 밤이다" 이 문장에 이 시의 직관을 따라 가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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