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 정원 / 박경원/ 민음사 (오늘의 작가상)
손전등을 든 풍경
사람은 보이지 않고 전등을 쥔 손만이 빼꼼이 비친다
어느 이름 모를 세월을 더듬는 듯한 저 낡고 허름한 불빛
저글저글
자갈들을 이끌고 오는 묵직한 움직임으로 보아
저쪽은 이미 온 길을 가고 있거나 간 길을 오고 있음이 분명하다
손전등이 뚫어놓은 속을 묵묵히,
돌멩이들의 어눌한 부위를 뻔히 알 듯
어디에선가 딱 끊어진 불빛의 절벽을 밀어내며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가설 극장에서 처음 본 영사기 불빛 같은 것
필시, 몇십 년 전의 장막 속에 나를 몰아넣을 것처럼 불빛의 절벽
그 끄트머리까지 나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마에 침을 바르면 졸음이 사라진다는
흑백 시절의 알 듯 말 듯한 미신의 한쪽을 환히 비추며
몇십 년 전의 내 안, 미로 같은 속으로 날벌레들을 밀면서 온다
손전등이 지나치고 헛기침이 지나치고
문득 뒤돌아보니 노인의 손엔
날벌레를 가득 담은 맑은 불빛통 하나 쥐어져 있었다.
[감상]
이 시는 손전등에 비친 풍경들을 통해, 지나온 삶에 대한 것들을 되돌아보는 시입니다. 우선 시의 틀이 견고한 것이 좋습니다. 일테면 "어느 이름 모를 세월을 더듬는 듯한 저 낡고 허름한 불빛"에서 볼 수 있듯이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공간을 명징하게 확보했다는 것이겠지요. 또한 그것이 노인의 손전등으로 마무리지음으로써 세월의 흐름과, 거기에서 "맑은"으로 이어지는 메타포를 비끌어냈다는 점이 출중합니다. 평범하지 않은 시선 길러내기, 이것이 요즘 시들의 화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