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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이성복

2001.11.15 11:11

윤성택 조회 수:1448 추천:212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성복 / 문학과지성사





        11월



        1
        등 뒤로 손을 뻗치면 죽은 꽃들이 만져지네
        네게서 와서 아직 네게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
        손을 빼치면 온통 찐득이는 콜타르투성이네
        눈을 가리면 손가락 사이로 행진해가는 黃帽派(황모파)
        승려들, 그들의 옷은 11월의 진흙과 안개
        김밥 마는 대발처럼 촘촘한 날들 사이로 밥알
        같은 흰 꽃 하나 묻어 있었네 오랜 옛날얘기였네

        2
        그대 살 속에 십 촉짜리 전구 수천 빛나고
        세포 하나하나마다 곱절 크기의 추억들
        법석거리니 너무 어지러워 눈을 감아도
        환하고 눈뜨면 또 어지러워 늘 다니던
        길들이 왜 이리 늙어 보이는지 펼쳐놓은
        통치마 같은 길 위로 날들은 지나가네
        타이탄 트럭에 실려 시내로 들어가는 분홍빛
        얼굴의 돼지들처럼, 침과 거품 흐르는 주둥이로
        나 완강한 쇠창살 마구 박아보았네 그 쇠창살
        침과 거품 흘러내려 흰 고드름 궁전 같았네

        3
        11월, 천형의 땅 삶긴 번데기처럼 식은
        국물위에서 11월, 기다리지 않았으므로
        노크 한번 하지 않았으므로 11월, 미구에
        감긴 눈으로 쏟아져들어올 흰 눈 흰 밀가루
        포대 터져 은박지로 구겨질 겨울 11월,
        이젠 힘이 부쳐 일어서지 않는 성기
        포르노처럼 선명한 욕망의 밑그림 11월,
        삼켜지지 않는 뜨거운 수제비알 같은 여름

        4
        겨울의 입구에서 장미는
        붉은 비로드의 눈을 뜨고
        흰 속눈썹처럼 흔들리는 갈대
        돼지 멱따는 소리로 우는
        가을꽃들의 울음을 나는
        듣지 못한다 초록 네온사인
        '레스토랑 청산' 위로 비가
        내리고 나는 세상의 젖은 몸
        위에 "사랑한다"라고 쓴다



[감상]
누구든 '11월'에 얽힌 감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시는 이성복 시인의 눈으로 보는 11월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이성복의 시에서는 '상처'의 것들이 만져집니다. 시대적이든 가족적이든 그 삶들이 투영된 결정체가 시라는 점,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 "사랑한다"로 귀결되는 부분이 자꾸 눈길을 끄는군요. 그 모든 기억들을 안으려는 시인의 행위, 시에 대한 진정성을 되새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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