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박성우
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生)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감상]
이 시는 한 남자의 자살과 거미의 생태가 하나의 시로 직조된 듯한 인상을 가지게 합니다. 각기 다른 곳에서 시작해서, 결국 마지막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로 합치는 부분은 적잖은 울림을 자아냅니다. 시 내용에 서사가 들어 있어 깊이를 더해준다는 점도 인상적이고요. 올해 신춘문예도 이같이 좋은 시가 당선의 길로 나오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