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껴 먹는 슬픔』/ 유종인/ 문학과지성사
정신병원으로부터 온 편지
가상이 내 몸에 알을 스는 밤, 이다
먼 기억엔 따뜻한 정신 병원에 쓸쓸함으로 갇혔던
누이가 있다, 그때 그녀는 정신 분열증이었으나
나는 정신 미분열증으로 고생하던 청춘, 이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 한다 모든
병명病名이 있는 입원은 행복하다 갇혀서
따뜻할 수 있는 자들의 몽환夢幻이
구름처럼 떠다니다 낮잠에 빠지는 사람들 속에
어린 꽃잎 같은 소녀가 남몰래 내 몸에 편지를 숨겼다
문득 내 몸은 붉은 우체통이 되었다, 집에
전화 연락 한번 해달라 부탁한 그 쪽지엔
탈출보다 극심한 폐쇄의 속살이 얼비쳤다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온갖 것들의 세상, 그곳으로부터
아무런 편지 없을 때, 나는
오지랖 좁은 詩들을 쓰며 그대 병동의 밤을
가끔 떠올린다, 이곳은 아직 수용되지 않았을 뿐
증세를 다 호명할 수 없어 그냥 놔둔 노천露天 병원!
따뜻한 간호사가 필요하다, 아직
꽃나무들, 먼 새들과 함께 어떤 증세로든 살아 있어
무릇 야릇한 소음과 정적으로 희망적이다
누이가 앓고 있는 만큼 소녀가 꿈꾸는 세상만큼
세상의 얼굴은 더 늙어 보이고, 늙어서 고치는 것은
목숨을 다치는 일뿐, 누군가 아직도 식물의 맘으로
동물의 상처를 앓고 있다
[감상]
유종인 시인이 요즘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특유의 어법에서 비롯됩니다. 시를 읽으면서 감탄하는 것은 그 언어들이 단단한 힘으로 시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상이 내 몸에 알을 스는 밤, 이다 "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이 시의 흐름을 조율하는 가운데, 정신병원과 화자 그리고 누이와의 관계들이 한껏 충만한 기운으로 드러납니다. 읽고 나면 왠지 통쾌해지는 기분, 사유가 분방하게 열려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