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 이기와 / 다층
지하역
지하30미터,
한때는 만개한 꽃처럼 구김없는 선명한 모양의 화석들이
이곳 어디엔가 오랜 비밀로 박혀 있음직도한
수 천, 수 만년 동안 지하 어둠의 사슬에 묶여 미동도 없던
영혼들이 길이 뚫리고 빛이 스며들면서 하나 둘 마법에서
풀려나 지금은 내가 서 있는 언저리를 휙휙 날아다닐 것도
같은
지하역.
아직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시간이 벽과 천장의 구석진 곳에
은밀히 흐르고 있다.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여러분께서는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육체없이 영혼만 타고 내리는 열차도 있을까?
요즘들어 내 영혼보다 비대해진 몸뚱아리가 거추장스럽다.
공복의 허전함으로 비롯된 심약한 생각의 끈을 자르고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선다. 충족되지 못한 뱃속의
허기처럼.
보호구역 안에서도 늘 불안감을 느끼는 206개의 뼈마디로
지탱하기 힘든 지상의 무게가 선로 위에 앉은 빛 한줌까지
파르르 떨게 한다.
희끗희끗 색이 바랜 벽화의 인물처럼 창백한 얼굴들이
승차구에 모여든다.
어쩌다 땅속까지 추방당한 아침.
거추장스러운 그림자를 하나씩 끌고 언젠가 화석으로 남을
시간들을 등에 지고, 깜깜한 터널 속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저 눈동자들.
어둠의 틈새로 열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이는 순간 닫혀있던
마음의 동공이 환히 열린다.
언젠가는 출구없는 지하역에서 영원히 맴돌지라도
아직은 살아 지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감상]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기와 시인의 첫 시집이 나왔습니다. 이 시는 도시에서 각박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단면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에 있는 사람들을 "거추장스러운 그림자를 하나씩 끌고 언젠가 화석으로 남을"로 표현한 직관적인 부분도 내내 인상에 남습니다. 벌레들의 길까지 파고든 우리의 모습, 어쩐지 다시금 반추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