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2001.09.07 12:01

윤성택 조회 수:1411 추천:179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강연호/ 문학동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감상]
강연호 『비단길』(세계사) 시집을 무척 좋아합니다. 이번에 새 시집이 나왔더군요. 이 시에서 놀라운 것은 나뭇잎이 물위에 떨어졌을 때 그 그려진 파문이 나무의 나이테를 기억하고 있다는 발견입니다. 어쩌면 좋은 시란 이렇듯 "그런 거다"라고 했을 때, 수긍이 가는 것이 아닐런지요. 다시 말해 "그런 거다"의 확고한 진언은 시적 직관력이고, 그 직관으로 말미암아 시적 울림으로 가는 방향이 제공되는 것은 아닌지요. 나뭇잎이 저 스스로 흔들린다는 것, 곱씹게 됩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31 석양리 - 최갑수 2002.05.23 1053 182
130 알쏭달쏭한 소녀백과사전 / 흰벽 - 이기인 [2] 2003.08.29 1052 176
129 막돌, 허튼 층 - 이운룡 2004.12.07 1049 202
128 꽃 속의 음표 - 배한봉 2003.04.23 1049 187
127 술병 빗돌 - 이면우 [1] 2003.03.18 1049 176
126 가스통이 사는 동네 - 안성호 2004.01.02 1048 187
125 산딸나무 - 고현정 2003.04.28 1048 167
124 소각장 근처 - 장성혜 2009.03.18 1047 110
123 드라큘라 - 권혁웅 2004.01.08 1047 187
122 수사 밖엔 수사가 있다 - 최치언 2002.05.20 1046 209
121 비 오는 날 사당동에서 총알택시를 타다 - 정 겸 2003.11.03 1044 167
120 눈의 여왕 - 진은영 2010.01.13 1042 105
119 탈피 - 박판식 2003.03.11 1042 208
118 폭설 - 심재휘 2003.01.22 1042 169
117 모기 선(禪)에 빠지다 - 손택수 2002.07.26 1041 187
116 시 - 조항록 2002.11.20 1039 163
115 염전에서 - 고경숙 2003.06.26 1038 177
114 25時 체인점 앞에서 - 최을원 2003.03.12 1038 172
113 네트워크 - 정학명 [1] 2004.06.22 1037 177
112 동사자 - 송찬호 2010.01.09 1032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