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캣츠아이 13 - 노혜경

2001.09.18 11:17

윤성택 조회 수:1298 추천:224

『창작과 비평』 2001년 가을호 / 노혜경

           캣츠아이 13    
                   - 미장원 처녀
    

     내 친구 숙이는 미장원 처녀. 도시의 변두리, 지친 사람들이  밤늦게
   돌아와 고단한 몸을 누이는 잠자리 곁에 그녀의 미장원이 있다. 우리가
   어릴 적 꿈꾸던 마술거울이 걸려 있진  않지만, 들여다보면 늘 바쁜 아
   줌마들이 뽀골거리는 파마를 하고 있는 곳.  꽃무늬 보자기를 뒤집어쓰
   고 서둘러 집으로 가는 거칠고  옹이진 손들 사이로, 그녀의  늙어버린
   엄마가 중고 미용실용 의자 위에서 잠들어 있다. 그녀의 사악한 남편이
   미용실 바깥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녀의  잔인한 시엄마가 손지갑을 흔
   들며 그녀를 때린다. 그녀의 굶어죽은  딸이 거울 속에서 잠들어  있다.
   그녀는 길게 담배 한모금  내뿜으며 한 손으로  드라이를 한다. 숙이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여자. 고통이  그녀의 생을 종이처럼 접어 부피
   가 두터운 책으로 제본을 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지  않는다. 그녀의 거울 속엔 지
   하실이 있고, 그 지하실 낡은 찬장  속엔 우리가 만들고 잊어버린 수많
   은 얼굴들이 있다. 아직도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그 아름다운 소녀의 얼
   굴. 복숭아빛 뺨에 어울리는 둥근 타래머리를 하고 싶어요. 공주처럼 머
   리를 높이높이 올리고 싶어요.  사내아이처럼 앞머리를 자르고  싶어요.
   거울 앞의 작은 소원들을 숙이의  거울은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해둔다.
   숙이가 낡은 집 먼지를 걷어내듯  거울 속으로 들어와 내 얼굴을  만진
   다. 불이 오른다. 차가운 그녀의 손이  내 불타오르는 얼굴을 식혀준다.
   부드러운 그녀의 손이 내 머리카락 사이로 노래를 흐르게 한다. 그녀의
   죽은 딸이 내 무릎 위에서 놀고 있다. 그녀의 손끝 아래서 늙은 여자들
   의 메두사 같은 머리가 안식을 얻는다.  고생을 모르는 손은 그 뱀들을
   만질 수 없다. 오직 그녀만이 뱀들이 노래 부르게 만들 수 있다.
    
     숙이는 미장원 처녀다. 오래오래 묵은.
    
    
     * 캣츠아이 : 묘안석,  또는 고양이눈이라 불리는  보석. 성분이 다른
   물질을 자기 속에 받아들여 빛의 다발로 엮어내기 위해 오래 참은 보석
   임.
    

[감상]
묘사가 인상적인 시입니다. 딸의 죽음과 그 죽음으로 인한 편린들이 그녀의 미장원의 삶을 뒷받침해줍니다. 또 나름대로 그 얼개는 시 전체를 이끌어가는 분위기에 충분히 기여하고 있고요. 가령 "그녀의 거울 속엔 지하실이 있고, 그 지하실 낡은 찬장 속엔 우리가 만들고 잊어버린 수많은 얼굴들이 있다"와 같은 문장은 상상력과 결부된 탁월한 시선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번쯤 미장원에 가서 슬픈 눈을 가진 그곳 주인을 만났다면 더더욱 생각나는 시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31 석양리 - 최갑수 2002.05.23 1053 182
130 알쏭달쏭한 소녀백과사전 / 흰벽 - 이기인 [2] 2003.08.29 1052 176
129 막돌, 허튼 층 - 이운룡 2004.12.07 1049 202
128 꽃 속의 음표 - 배한봉 2003.04.23 1049 187
127 술병 빗돌 - 이면우 [1] 2003.03.18 1049 176
126 가스통이 사는 동네 - 안성호 2004.01.02 1048 187
125 산딸나무 - 고현정 2003.04.28 1048 167
124 소각장 근처 - 장성혜 2009.03.18 1047 110
123 드라큘라 - 권혁웅 2004.01.08 1047 187
122 수사 밖엔 수사가 있다 - 최치언 2002.05.20 1046 209
121 비 오는 날 사당동에서 총알택시를 타다 - 정 겸 2003.11.03 1044 167
120 눈의 여왕 - 진은영 2010.01.13 1042 105
119 탈피 - 박판식 2003.03.11 1042 208
118 폭설 - 심재휘 2003.01.22 1042 169
117 모기 선(禪)에 빠지다 - 손택수 2002.07.26 1041 187
116 시 - 조항록 2002.11.20 1039 163
115 염전에서 - 고경숙 2003.06.26 1038 177
114 25時 체인점 앞에서 - 최을원 2003.03.12 1038 172
113 네트워크 - 정학명 [1] 2004.06.22 1037 177
112 동사자 - 송찬호 2010.01.09 1032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