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 정영선

2001.07.12 12:11

윤성택 조회 수:1620 추천:337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 / 정영선 / 문학동네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비 온 뒤 말갛게 씻겨진 보도에서
         한때는 껌이었던 것들이
          검은 동그라미로 띄엄띄엄 길 끝까지 이어진 것을 본다
          생애에서 수없이 맞닥뜨린, 그러나 삼킬 수 없어 뱉어버린
          첫 만남의
          첫 마음에서 단물이 빠진 추억들
          첫 설렘이 시들해져버린 것들은 저런 모습으로
          내 생의 길바닥에 봉합되어 있을지 모른다
          점점으로 남겨진 검은 동그라미 하나씩을 들추면
          가을잎 같은 사람의 미소가 여직 거기 있을까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너무 다급해서
          차창의 풍경을 보내듯 흘려버린 상처들
          비 맞으면 저리 깨끗하게 살아난다
          씻겨지지 않은 것은 잊혀지지 않은 증거이다
          어떤 흉터 속에 잠잠한 첫 두근거림 하나에 몸 대어
          살아내느라 오래 전에 놓아버린,
          건드리기만 하면 모두 그쪽으로 물결치던
          섬모의 떨림을 회복하고 싶다
          단물의 비밀을 흘리던
          이른봄 양지 담 밑에서 돋던 연두 풀잎의 환희를
          내 온몸에서 뾰죽뾰죽 돋아나게 하고 싶다



[감상]
보도블록에 검게 들어붙은 껌에서 출발하여, 추억과 상처에 다다라 결국 풀잎으로 치환되는 흐름이 원숙하지요. 생각해보면 그 껌의 흔적은 분명 누군가의 입안에서 우물거리고 있었을 터이고, 그때 그 생각 느낌들이 마음을 필사하듯 껌에 찍혀져 뱉어졌을 것입니다. 글쎄요. 요즘 함부로 껌을 뱉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어떤 원인이 따로 있지는 않을까요? 그러니까 바닥에 들어붙은 껌은 분명, 푸! 하고 치명적으로 봉합된 흔적들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1 누가 내건 것일까 - 장목단 2003.04.22 1018 152
90 지하도에서 푸른 은행나무를 보다 - 서안나 2003.06.16 1017 164
89 음풍 - 박이화 2003.12.12 1016 201
88 구름, 한 자리에 있지 못하는 - 이명덕 2003.03.17 1016 179
87 내 그림자 - 김형미 2011.01.14 1014 84
86 자전거포 노인 - 최을원 2003.09.03 1013 166
85 적(跡) - 김신용 2002.09.06 1013 172
84 사라진 도서관 - 강기원 2010.01.21 1011 106
83 나무의 손끝 - 신원철 2003.05.23 1010 167
82 내가 읽기 전엔 하나의 기호였다 - 고현정 2002.12.30 1009 180
81 접열 - 권영준 2003.11.04 1008 186
80 공사장엔 동백나무 숲 - 임 슬 [1] 2002.11.07 1008 167
79 다대포 일몰 - 최영철 2002.06.26 1007 180
78 영자야 6, 수족관 낙지 - 이기와 2002.06.03 1007 182
77 어물전에서 - 고경숙 2002.11.19 1005 180
76 부리와 뿌리 - 김명철 [1] 2011.01.31 1004 109
75 산란2 - 최하연 2003.11.27 1004 178
74 목단꽃 이불 - 손순미 2003.04.15 1004 149
73 못을 박다가 - 신현복 2009.12.07 1003 112
72 무덤생각 - 김용삼 2003.01.23 1000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