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그린 듯이 앉아 있는 풍경 - 박형준

2001.06.18 13:20

윤성택 조회 수:1534 추천:280

박형준 /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문지),『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창비)


       그린 듯이 앉아 있는 풍경



        비가 오면 민둥산인 마음은 밑뿌리로 하얗게 울었다
        비가 오면 새파란 양철지붕의 페인트칠이 벗겨진 자리에
        녹이 한번 더 슬고,
        여름 내내 붉은 반점이 집의 살갗을 뒤덮었다
        우리집 앞으로 흐르는 개울창에 녹같은 붉은 꽃들이
        섞여 흘러갔고,

        밤이 되어 송진이 녹아흐르는 여름의 가장자리에
        쇠파리떼들이 조용히 끓었다
        하늘에 붉은 달이
        양철지붕 칠이 벗겨진 자리에 돋아난 반점같은
        꽃들을 핥아주었다
        달의 긴 혀로 인해 나의 몸은 언제나 신열이 났다
        먼지 자욱이 날리며 집을 나간 개는
        침을 하얗게 흘리며 돌아오고
        가난한 집일수록 커다란 솥만한
        잎을 흔들며 벌레 많은 해당화 그늘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지
        
        언덕 위에 언덕이 생기고 구릉을 이루며 산들이 달아나고
        피가 도는 발바닥 같은 꽃들이 해당화 위를 지나가자
        그 잎 몇 개에는 흔적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린 듯이 앉아 있는 흔적을 흔적으로 지우려고
        열매를 무수히 매단
        나무를 떠올리곤 한다,
        병든 어머니의 희게 빛나는 피부 밑에
        천길 낭떠러지 검은 물이 흘러간다




[감상]
비가 오는 정경이 눈에 선합니다. 비는 소리없이 계속 내리고, 시인은 시선은 한없이 자맥질합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71 바코드, 자동판매기 - 이영수 2002.05.21 1000 178
70 해바라기 - 신현정 2009.11.13 999 118
69 바닷가 사진관 - 서동인 2003.11.01 999 183
68 사유하는 텔레비전 - 우대식 2004.01.05 993 210
67 폭주족의 고백 - 장승진 [1] 2009.02.12 992 111
66 만리동 미용실 - 김윤희 2003.05.20 990 164
65 한천로 4블럭 - 김성수 2003.03.05 988 202
64 내외 - 윤성학 2003.06.23 986 169
63 바람분교 - 한승태 2002.12.04 984 179
62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 김사인 2003.02.05 983 169
61 피라미와 피라미드 - 이승하 2003.07.07 978 196
60 개심사 거울못 - 손정순 2002.11.04 978 170
59 늙은 정미소 앞을 지나며 - 안도현 2003.04.21 976 155
58 철자법 - 문인수 2003.05.15 972 166
57 낙마 메시지 - 김다비 2003.06.09 971 176
56 묵음의(默音) 나날들 - 은 빈 2003.02.12 964 158
55 산란 - 정용기 2003.08.01 962 167
54 낯선 길에서 민박에 들다 - 염창권 2003.05.16 962 161
53 밤 막차는 왜 동쪽으로 달리는가 - 김추인 2003.10.21 959 156
52 불찰에 관한 어떤 기록 - 여태천 2003.07.01 956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