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맛있다』 / 박장호 ( 2003년『시와세계』로 등단) / 랜덤시선 44 (2008)
검은 방
어제는 웃고 있었다. 술에 많이 취했고 슬레이트 지붕
에 비가 내리치고 있었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누군
가와 전화를 하며 웃고 있었다. 어제는 웃고 있었다. 기억
나지 않는 말들을 했고 기억나는 말을 들었다. 오늘은 행
복해 보이시네요. 창백한 그림자가 방 안에 드리워지고
있을 때 나는 검은색의 관으로 변해가며 웃고 있었다. 말
은 쉽게 흩어지고 오래 떠도는 법. 나밖에 없는데 살인이
하고 싶은 이유와 창도 없는데 비가 들이치는 이유를 생
각하며 이불 속에서 웃고 있었다.
어제는 웃고 있었다.
[감상]
기억은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개인(실존)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제를 기억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에 의해서 선택된 과거의 복기와 같습니다. ‘웃는다’는 것은 기쁘거나 만족스러울 때 얼굴에 깃든 표정일 터인데, 이 시의 전체적인 흐름은 우울한 음악처럼 바닥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웃고 있다는데 정말 웃고 있는 걸까하는 궁금증. 그러나 웃고 있다는 화자의 의지를 상상해봄으로서 비롯되는 쓸쓸한 연민 같은 것이 전해져 옵니다. ‘기억나지 않는 말들을 했고 기억나는 말을 들었다’, 타인과의 관계로 깨어 있는 어제. 그 눈빛이 시집 전체를 지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