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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연약한 재료들 - 이장욱

2008.11.03 21:45

윤성택 조회 수:1384 추천:115

「밤의 연약한 재료들」 / 이장욱 (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 《현대문학》 2008년 2월호


        밤의 연약한 재료들

        밤이란 일종의 중얼거림이겠지만
        의심이 없는
        성실한
        그런 중얼거림이겠지만

        밤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않고
        맹세를 모르고
        유연하고 겸손하게 밤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중

        죽은 이의 과거가 빈방에서 깊어가고
        소년들은 캄캄한 글씨를 연습하느라 손가락만 자라고
        늙은 개의 이빨은 밤마다
        설탕처럼 녹아가는데

        신축건물들이 들어서자
        몇 개의 골목이 중얼중얼 완성되고
        취한 남자는 검게 그을린 공기 속을 흘러가고
        밤은 그의 긴 골목이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드디어 외로운 신호처럼
        보안들이 켜지자
        개의 이빨은 절제를 모르고

        갓 태어난 울음들이
        집요하고 가득한 밤을 향해
        오늘도 녹아가는 이빨을
        필사적으로 세우고

        
[감상]
밤은 일상적인 것이지만 그 안의 ‘어둠’을 생각하노라면 두려움이 앞서곤 합니다. 그야말로 어둠은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정의 이면에는 현실보다 조밀한 우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늙은 개가 짖고 취객이 사라져도 어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밤은 들릴 듯 말듯 중얼거리며 그 너머를 상상케 할 뿐입니다. 삶은 야성 그 자체이고 '어두워질수록 거칠어지는 건 추억'밖에 없습니다. 어둠 속 한 켠에서 태어나고 죽어가는 수많은 것들에게 우리는 외롭게 ‘녹아가는 이빨을/ 필사적으로 세우고’ 두려움을 견뎌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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