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죽 북』 / 문신 ( 2004년『세계일보』로 등단) / 애지시선 023
빗방울 꽃
남쪽에서 길을 놓치고 민박집에 들다
늦게까지 불 켜두고 축척지도의 들길을 더듬다
쩌렁쩌렁 난데없는 소리에 억장 무너지다
알고 보니 민박집 양철 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아니, 야음을 틈타 양철 지붕에 꽃잎 피어나는 소리
꽃잎 자리에 얹힌 허공이 앗 뜨거라, 후닥닥 비켜 앉는 소리
깊은 밤 먼 골짜기에 잠든 귀 어두운 뿌리도 들으라고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
민박집 방에 걸린 농사달력은 곡우(穀雨)
이 빗방울 스미는 자리마다 꽃잎 꽃잎
묻어둔 뿌리를 깨우는 소리 쩌렁쩌렁
양철 지붕에 꽃잎 피어나는 소리
내 안까지 적셔내는 소리
내 안에서 꽃잎 피어나는 소리
민박집 나서며 바라본 처마 끝 낙수 자리
꽃잎처럼 둥글게 피어서
꽃잎들이 묻어둔 뿌리까지 스민 흔적
[감상]
빗방울이 꽃으로 옮겨가는 흐름이 잔잔하게 와닿습니다. 청각과 시각을 아우르는 표현들이 마치 빗방울처럼 촉촉하게 연이어 수사로 적셔온다고 할까요. 아마도 ‘민박집’이라는 시적 공간 때문에 더더욱 감성이 풍부해지는 건 아닐지요. 누구에게나 ‘민박집’에는 한때 청춘이었고 사랑이었고 우정이었던 기억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때로는 여행이라는 특수한 국면이 우리의 귀를 터주고 눈을 밝게 합니다. 진정 빗소리에 마음이 이처럼 열리는 날이 언제였던가, 그 4월이 빗방울 주위에 왕관을 드리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