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빗방울 꽃 - 문신

2009.02.09 17:55

윤성택 조회 수:1155 추천:108


『물가죽 북』 / 문신 ( 2004년『세계일보』로 등단) / 애지시선 023


        빗방울 꽃

        남쪽에서 길을 놓치고 민박집에 들다
        늦게까지 불 켜두고 축척지도의 들길을 더듬다
        쩌렁쩌렁 난데없는 소리에 억장 무너지다

        알고 보니 민박집 양철 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아니, 야음을 틈타 양철 지붕에 꽃잎 피어나는 소리
        꽃잎 자리에 얹힌 허공이 앗 뜨거라, 후닥닥 비켜 앉는 소리
        깊은 밤 먼 골짜기에 잠든 귀 어두운 뿌리도 들으라고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

        민박집 방에 걸린 농사달력은 곡우(穀雨)
        이 빗방울 스미는 자리마다 꽃잎 꽃잎
        묻어둔 뿌리를 깨우는 소리 쩌렁쩌렁
        양철 지붕에 꽃잎 피어나는 소리

        내 안까지 적셔내는 소리
        내 안에서 꽃잎 피어나는 소리

        민박집 나서며 바라본 처마 끝 낙수 자리
        꽃잎처럼 둥글게 피어서
        꽃잎들이 묻어둔 뿌리까지 스민 흔적

 
    
[감상]

빗방울이 꽃으로 옮겨가는 흐름이 잔잔하게 와닿습니다. 청각과 시각을 아우르는 표현들이 마치 빗방울처럼 촉촉하게 연이어 수사로 적셔온다고 할까요. 아마도 ‘민박집’이라는 시적 공간 때문에 더더욱 감성이 풍부해지는 건 아닐지요. 누구에게나 ‘민박집’에는 한때 청춘이었고 사랑이었고 우정이었던 기억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때로는 여행이라는 특수한 국면이 우리의 귀를 터주고 눈을 밝게 합니다. 진정 빗소리에 마음이 이처럼 열리는 날이 언제였던가, 그 4월이 빗방울 주위에 왕관을 드리웁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91 낡은 침대 - 박해람 [2] 2006.07.22 1918 219
1090 2008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5] 2008.01.09 1917 139
1089 거의 모든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 김경주 [2] 2004.07.28 1913 174
1088 2009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09.01.10 1907 126
1087 그리운 이름 - 배홍배 [1] 2005.07.08 1907 203
1086 당신이라는 이유 - 김태형 2011.02.28 1906 126
1085 틈 - 신용목 2005.08.02 1902 230
1084 푸른 밤 - 나희덕 [1] 2001.07.27 1900 268
1083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2] 2008.06.17 1897 143
1082 꽃의 흐느낌 - 김충규 2005.06.09 1895 204
1081 목도리 - 박성우 [1] 2006.03.23 1894 243
1080 집으로 가는 길 - 김선주 [1] 2004.08.29 1892 181
1079 첫사랑 - 하재봉 2001.07.09 1892 306
1078 전망 좋은 방 - 장경복 2001.04.23 1888 325
1077 책들 - 강해림 2006.07.07 1881 249
1076 울고 있는 사내 - 장만호 2006.07.31 1879 229
1075 정기구독 목록 - 최갑수 [1] 2001.04.10 1879 280
1074 아득한 봄 - 천수호 2006.07.01 1876 223
1073 우울한 샹송 - 이수익 2001.04.13 1876 324
1072 죄책감 - 신기섭 2006.05.29 1871 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