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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의 시간 - 유희경

2008.12.16 22:42

윤성택 조회 수:1526 추천:145

<공중의 시간> / 유희경 (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현대한국시》2008년 가을호


        공중의 시간

        1
        이 시는 정박한 시간에 대한 것이다
        미열에 들떠 휴지로 창문을 닦았을 때
        계절은 창 밖에서 시작되었다
        공중을 조립하기 위해 덩치가 큰 사내들은
        도시를 떠났다 곧 그들이 떨어뜨린
        공중의 부속이 땅을 흔들 것이다
        거실의 시계는 멈추고 나는 침대에 누워
        초라한 병에 시달리는 나의 가족사를 생각한다
        죽일 년놈들이 되어 잠든 우리

        2
        가끔, 안경을 잃어버리는 꿈을 꾼다 죽은
        아비의 목소리가 심장의 크기를 키운다
        아무도 없이 소리만 들리는 풍경 느닷없이
        눈이 내린다 길은 늙은 팔을 힘없이 떨구고
        천천히 숨을 끊는다 그러니 나는
        시력보다 나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
        혼자서 지어두었던 아들의 이름은 이미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버지
        내게 말 걸지 마세요

        3
        회색 눈빛을 가진 나의 아들이
        빛을 주워 담기 위하여 고궁(古宮)의 뜰로
        달려간다 오, 언제나 태양은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그늘이 좋았으므로
        강낭콩 싹 한 번 틔어보지 못한 끈기로
        늘 그늘을 키운다 이름 없는 나무들은
        죽기 직전에 숲을 만든다 그러므로
        나무는 못된 무덤 아들아 나는
        네가 나무 악기로 태어나기를 바랐다
        너의 아비의 아비는 유명하지 않은 악보
        엄마란 리시버로 음악을 듣는 사람
        너의 고모는 조금만 슬퍼도 우는 아이였다
        그러니 아들아, 어깨란 닮아지는 것이 아니라
        훔치는 것이다 기억해 두거라 세상은
        어떤 각오로 태어나야 하는 것인지

        4
        공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공을 사랑하고
        우리는 그들을 추억한다 누구나 잃어버린
        공터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법 늑대 같은 순간이
        폭발한다 깔깔대며 달아나는 공을 찾아 사라지는
        아이들 내게 맞는 어깨란 없다 뼈라는 이 오래된
        유전 먼 미래의 유골이 분말이 되어
        쏟아진다 빈 몸을 털어 내일을 장만해야겠다
        나는 검은 봉투 같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감상]
좋은 시는 차이 속에서의 친밀성이 탁월합니다. 전혀 다른 소재와 소재를 하나의 패턴으로 묶어내는 작업이야말로 시인의 영감일 것입니다. 또한 그 ‘차이’를 크게 둘수록 시적 모험은 더 강렬하며, 이러한 시도가 독자에게 감응되었다면 주제의 울림이 그만큼 커집니다. 적당한 시읽기로 독해 능력이 있는 독자라면 이러한 경우를 ‘재미있다’라고 표현해야겠지요. ‘공중’이라는 관념 속에서 가족사와 꿈이 에피소드처럼 이어집니다. 행과 행 사이에서 번번이 시원스럽게 박살나는 상식을, 현실이 변형되는 기형의 아름다움을 천천히 읽습니다. 위태로울수록 이를 떠받치는 은유가 튼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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