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기록들 - 윤영림

2009.02.16 10:41

윤성택 조회 수:1061 추천:114

  
「기록들」 / 윤영림 (2000년 『심상』으로 등단) / 『유심』 2009년 1 / 2월호


  기록들
           - 2008110717

  찬바람이 떠다니는 강변 쪽으로 생각은 점멸한다. 바람은 어디로
  뿌리를 두었는지, 억새와 부들처럼 나의 내면의 기록들이 수시로
  몸을 떨었다.

  안개가 자욱 내려앉은 산책로는  빨간 지문들로 환하다.  나비가
  날았던 자리에 눈발이 날릴 것 같다.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었는
  데 참은 것 같다.

  ‘무슨 말인가’를 참았던 것 같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
  보는 K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마 저걸 절정이라고 하는 거겠지. 새떼가 서쪽 하늘에서 빛났다.

  새들이 날아간 허공이 따스할 거라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다.
  나는 초연한 척  흐릿한 인공정원의 산책로를  착색바람개비처럼
  통과하였다.

  “나는 앉아서 성자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에
  게 경배하러 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육체를  물을 묻히고 녹이
  슬기를 기다렸다.”*

  오늘밤, 이곳에서는 틀림없이 은빛 서리가 쌓일 것이다.


* 기형도의 <짧은 여행의 기록>에서

        
[감상]
처음 시를 알게 된 것은, 시라는 장르를 배워서가 아니라 끄적이던 일기가 낯설어졌을 때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일기로 적었지만 일기가 아니고 그 이상의 그 무엇일 것 같다는 느낌. 그래서 일상에서 메모는 때때로 일기의 기능을 넘어 시를 꿈꿉니다. 이 시는 그런 일기의 기록과 詩라는 영혼성에 걸쳐 있습니다. ‘새들이 날아간 허공이 따스할 거라는 생각’과 영문을 모르는 동행의 손을 잡아주는 것. 시에서 중요한 덕목은 이렇듯 진정성을 잃지 않는 시정신입니다. ‘~같다’의 잦은 쓰임도 묘한 매력을 끄는데, 시적 현장의 감정을 확정하지 않고 객관화하려는 노력이 담담하게 정서를 이끈다고 할까요. 실존적 감성이 풍부해지는 시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91 검은 혀 - 김산옥 2009.04.21 1456 123
1090 녹색 감정 식물 - 이제니 2011.01.24 1067 123
1089 한순간 - 배영옥 [1] 2011.02.08 1475 123
1088 늪이 잠시 흔들렸던 기억 - 이수익 2007.08.03 1200 124
1087 비상등에 그려진 사내 - 김승일 2008.02.14 1388 124
1086 꽃*천상의 악기*표범 - 전봉건 2009.01.21 1201 124
1085 아코디언 연주자 - 김윤선 2009.05.18 1588 124
1084 야생사과 - 나희덕 2009.11.23 1068 124
1083 크래커 - 김지녀 [1] 2008.01.18 1212 125
1082 어느 행성에 관한 기록 - 이정화 2009.12.16 929 125
1081 사십대 - 고정희 2011.02.22 1638 125
1080 네온사인 - 송승환 [1] 2007.08.07 2063 126
1079 잠적 - 최문자 2008.02.01 1265 126
1078 2009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09.01.10 1907 126
1077 3월 - 최준 2009.04.01 1244 126
1076 당신이라는 이유 - 김태형 2011.02.28 1908 126
1075 슬픈 빙하의 시대 2 - 허 연 [1] 2008.11.05 1518 127
1074 겨울의 이마 - 하정임 2009.12.18 1189 127
1073 송곳이 놓여 있는 자리 - 이기인 2011.03.02 1235 127
1072 방황하는 피 - 강기원 [1] 2011.03.09 1975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