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신현림/ 세계사
백제탑 가는 길
사무치는 일도 없이 시간만 흘러 시간의 뜨물만 마셔
이 푸른 저녁의 손가락을 뜯어먹으며 모두 어디로 가나
나는 왜 부여로 가나
털로 된 타이어처럼 차바퀴는 구르지 않아 어디를 가
든 자동차 곡창지대 화환 가득한 영안실처럼 도로는 아
름다운 관짝들로 잠겨간다 어디를 가든 딱딱해진 빵냄
새 화석냄새 숨막히게 머리는 바늘집이다
허기진 내 혼의 성지, 백제를 보고 싶다 육탈된 설움
의 뼈가 빛나는 정림사지석탑 썰렁해도 정돈된 방의 아
늑한 방 같은 백제탑이
세월의 흰 뱀을 휘감듯, 무섭게 갈대가 울 듯, 무섭게
해를 삼킨 나무 아아, 무섭게 나무냄새가 타오르는 백
제탑을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 진흙의 달을 잃어버린 사
람 자기를 잃어버린 사랑 알 수 없다 빠져나갈 수 없다
아직도 서울을 하늘까지 밀리고 밀리는 자동차유골을
시간의 핏줄만 찢어 결국 우리를 죽이고 마는
[감상]
신현림은 "세기말 부르스"로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그 시집이 말이 많았던 것은 누드를 실었다는 점인데, 그 전 시집인 이 시집에도 사진과 시가 조화된 기미가 보입니다. 백제탑에 가는 길, 차가 막히는 순간을 상상력으로 풀어냅니다. "관짝들로 잠겨"가는 도로, "하늘까지 밀리는 자동차 유골" 표현이 새롭습니다. 어쩌면 이 시처럼 우리는 삶이라는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위에서 죽을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