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젊은시》 中 / 안숭범/ 《문학나무》
날 저문 골목
길에 내려앉은 그림자가 어둠을 키워
골목 끝자락까지 무럭무럭 몸을 불린다
그렇게 내게서 떠난 어둠이 골목을 채우고
다시 내게 돌아와 발밑에 밟히는 저녁
외등의 무릎을 스치며
긴 생머리를 한 여자가 지나가고
여자를 뒤따르는 몇몇 향기가
음흉한 내 생각에 들러붙는다
때마침, 구름은 반성문의 흰 여백을 남겨
나는 질릴 법도 한 욕망을 붙드느라
여간 바쁜 게 아니다
모든 욕망은 덮어둬야 할 하고많은 이유를 가져
이토록 귀찮은 옷을 입어야 하는지
단추는 이리도 많아 숱한 구멍들 바깥으로
생각을 비워야 하는지, 그 순간에도
구멍들 사이로 언뜻 비치던 속옷
속옷 속에 비치던 여자의 몸
수시로 늘어나는 그림자를 쫓다 보면
알게 된다,
그림자는 항상 빛이 간질일 수 없는
가장 먼 쪽으로 머리를 누인다는 걸
꾹 잠겨진 나의 옷장엔 제법 옷이 많다
[감상]
저녁 무렵 가로등 밑 골목을 지나는 긴 생머리 여자에서 촉발되는 심상이 신선합니다. <여자를 뒤따르는 몇몇 향기가/ 음흉한 내 생각에 들러붙는다>에서처럼 <욕망>이라는 생리적인 관념을 물리적인 현상으로 맞물려놓는 비유도 눈에 들어오는군요. <옷>은 그야말로 감추거나 드러내는 욕망의 수단입니다. 그에 딸려 있는 단추 또한 개폐의 기능 외에 노출의 단계를 조절하는 기능도 갖겠지요. 마지막 연에 이르러 욕망의 적나라한 전시가 옷이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껴봅니다.